본문 바로가기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장정일4

장정일 「月刊 臟器」 月刊 臟器  장정일  제호(題號)가 이렇다 보니 저희 잡지를 대한내과이사회나 대한개원내과의사회의 기관지로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더군요. 또 어떤 분들은 한국장기기증협회 기관지로 오해하시기도 합니다. 하지만 《月刊 臟器》는 창간한 지 29년째 되는 순수 문학 잡지입니다. 아(我) 지면을 통해 시인 6789명, 수필가 533명, 소설가 67명, 평론가 21명이 등단했습니다. 이 가운데는 이름을 대면 알 만한 한국 대표 시인과 중견 소설가가 즐비하죠. 그냥 해 보는 가정입니다만, 이 분들이 동시에 활동을 멈추게 되면 한국 문학은 그야말로 시체가 되죠. 이분들이야 말로 한국 문학의 심장, 폐, 간, 위, 쓸개, 신장, 비장......이니까요. 연혁이 비슷한 다른 문예지에 비해 저희 잡지가 배출한 작가의 숫자가 절.. 2024. 5. 2.
장정일 「하나뿐인 사람」 하나뿐인 사람 장정일 머리는 까마귀 귀는 토끼 눈은 사슴 눈썹은 강아지 코는 고양이 입술은 앵무새 혀는 낙지 이빨은 상어 뺨은 백조 목은 기린 가슴은 여우 젖꼭지는 무당벌레 겨드랑이는 닭 어깨는 펭귄 두 팔은 원숭이 손은 비둘기 손톱은 두더쥐 허리는 뱀 배꼽은 다슬기 엉덩이는 말 허벅지는 캥거루 종아리는 치타 발목은 두루미 발은 연어 발가락은 미꾸라지 발톱은 양 항문은 거미 《눈 속의 구조대》(민음사 2019) "말놀이를 한 시는 그만 좀 보고 싶다!" 그런 댓글을 여러 번 썼다. 역겨워서 그냥 지나올 수가 없었다. 이 시를 보고는 그런 말을 못하겠다고 생각했다. 간단치 않다. 2023. 5. 31.
장정일 「저수지」 저수지 장정일 마을 앞 손바닥만 한 못에서 개헤엄을 치던 여름방학 때의 어느 날, 동네 형들과 이웃 마을 저수지로 원정을 갔다. 형들이 긴 나뭇가지로 길 옆에 난 수풀을 휙휙 치면, 조무래기들도 따라서 작은 나뭇가지를 휘둘렀다. 저수지로 가는 길가에 드문드문 가지밭이 있었다. 형들은 햇빛에 익어 뜨끈뜨끈해진 가지를 베어 물었다. 형들이 "맛있다"고 우물거리면 조무래기들도 "맛있다"고 조잘거렸다. 형들이 "아, 맛없어" 하며 등 너머로 반쯤 베어 문 가지를 내어 던지면, 조무래기들도 입에 든 가지를 퉤퉤 소리 내어 내뱉었다. "아, 맛없어" 우리 입술은 가지 물이 들어 모두 자주색이 되었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 걸었을 때, 장성처럼 우뚝한 짙푸른 둔덕이 나타났다. 형들이 인디언 같은 소리를 내며 앞장서 .. 2023. 4. 25.
장정일 시집 《햄버거에 대한 명상》 장정일 시집 《햄버거에 대한 명상》 민음사 2018(1987) 2019년 12월 26일 성탄절 이튿날 동네 서점에서 이 시집을 샀다. 1987년 3월 30일, 시인이 스물다섯 살 때 초판을 냈으니까 나는 33년 만에 마침내 이 시집을 산 것이다. 나는 시, 소설, 희곡, 수필처럼 버젓한 이름을 가진 글이 아닌 잡문이나 쓰며 지냈지만 33년 만에, 그러니까 내가 죽어서 일체의 흔적도 보이지 않는 날 단 한 권이라도 내 책을 찾는 사람이 있다면 그 일은 내게는 중차대한 사건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신식 키친 재래식 부엌을 신식 키친으로 바꾸자 싱크대를 달고 가스렌지 설치하니 너무나 편해 재래식 부엌을 신식 키친으로 바꾸자 부엌까지 끌어온 수도꼭지 삑삑 틀어 과일 씻어놓고 가스렌지 탁탁 켜 계란 구으니 .. 2023. 3.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