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우아한 우주6

마지막 남아야 할 한 단어 다 사라지고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는 지식은 단 한 문장, 한 문장이 안 된다면 그럼 한 단어, 단어도 길어서는 안 된다면 단 두어 글자로 된 단어, 그것에 대해 알아보고 싶었다. 그것은 무엇일까? 사랑? 믿음? 힘? 돈? 기억 혹은 추억? 고독? 향수? 상상력 혹은 추리력?...... 나로선 도무지 재미가 없지만 유명한 어느 과학자는 그게 '원자 가설'이라고 했단다. # 1 1960년대 초, 아주 비범한 미국의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은 강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만약 어떤 대격변이 일어나서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 지식이 모두 파손되고 오직 한 문장만이 남아 다음 세대의 피조물에 전해지게 된다면, 가장 적은 글자 수에 가장 많은 정보를 담을 수 있는 말은 무엇일까요? 나는 원자 가설(혹은 원자에 관한 사.. 2024. 4. 10.
나무의 기억 '나는 지금 내가 있는 곳의 주인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려고 해도 되지 않는다. '내가 떠나면 세상은 어떻게 되나?' 그렇게 생각하게 된다. '내가 떠나도 저 나무는 당연하다는 듯 저기 저렇게 서 있겠지.' 그럴 때 나는 나무를 멍청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어느 날 나무는 생각할 것이다. '한때 그가 이 길을 다녔지. 그의 잠깐을 영원처럼 여겼지.' 나무는 다시 다른 사람이 오가는 걸 보면서 곧 나를 잊을 것이다. 잊진 않을까? 사람은 무엇이든 금세 잊거나 오래 기억하거나 하지만 나무는 기억할 것은 영원히 기억하고, 기억하지 않을 건 아예 염두에 두지 않는지도 모른다. 나무는, 가령 저 밤나무 같으면 어떻게 적어도 150년 혹은 수백 년을 살까? 당연히 할 일이 있겠지? 할 일도 없는데 태어나고 살.. 2024. 1. 9.
'헤아릴 수 없는 천국' '우주'universe라는 용어는 지금까지 관측되었거나 앞으로 관측될 모든 은하를 총칭하는 것으로, 알려지거나 알려지지 않은 모든 천체와 우주적 경이의 총체다. 1920년대만 해도 천문학자들은 우주에 있는 모든 별이 우리 은하에 속해 있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다 헤아릴 수도 없을 수십억 개의 은하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지금 보면 아주 깜찍한 생각이다. 우리는 '우리 은하'가 우주의 전부라고 생각했는데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수십억 개의 은하가 존재한다면서 우리 은하가 우주의 전부라고 믿었던 그 생각을 '아주 깜찍한 생각'이었다고 표현한 걸 보고 미소를 지었다. '깜찍한 녀석' '깜찍한 놈'이라고 할 때의 그 '깜찍한'. 2014년 9월, 천문학자들은 우리 은하가 속한 은하군의 너비가 5억 광.. 2023. 12. 28.
새의 뼈 몇 개 달린 블루베리를 직박구리에게 빼앗기고 나서 인터넷에서 찾아보고 어설픈 방조망을 설치했더니 영리한 그 녀석들이 그 아래로 기어들어가 새로 익은 열매들을 또 실컷 따먹고 이번에는 그 방조망을 헤치고 나오질 못해 기진맥진할 때까지 퍼드덕거리다가 지쳐 쓰러진 걸 보게 되었다. 직박구리들은 블루베리뿐만 아니라 벗지, 살구, 앵두, 대추, 보리수 열매... 달착지근한 건 뭐든 남겨둘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내가 심은 나무 열매는 내 계산으로는 내 것이긴 하지만 그들에게 물어보지 않았으니 내 계산만으로 일방적인 결론을 내릴 수는 없지 않겠나 싶기도 했다. 그러니 그 녀석이 지쳐 쓰러졌거나 말거나 그냥 둘 수는 없으므로 일단 살려 놓고 보자 싶어서 방조망 아래로 손을 집어넣었더니 그럴 기력은 남아 있었던지 제.. 2023. 12. 25.
해 뜨는 시간의 인사와 기도 모든 것은 질량 중심 둘레를 돈다. 태양 역시 다른 별들과 함께 은하수 중심 주위를 공전한다. 태양이 한 번 공전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천문학적 1년이라고 하는데, 이는 시속 82만 8,000킬로미터에 해당한다. 이렇게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움직여도 은하 둘레를 한 바퀴 도는 데 지구 시간으로 약 2억 3천만 년이나 걸린다. 일전에《우아한 우주》(엘라 프랜시스 샌더스)라는 책에서 이 글('전형적인 별, 태양')을 읽었다. 우리 세상의 저 태양이 새삼 고마웠다. 시속 82만 8,000킬로미터! 그 엄청난 속도로 달리던 태양이 "난 하도 많이 돌아서 이제 이 짓이 싫어!" 하고 딴 곳으로 달아나버리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 태양이 은하 둘레를 딱 한 바퀴만 도는 데 2억 3천만 년이나 걸린다니.. 2023. 12. 5.
엘라 프랜시스 샌더스 《우아한 우주》 엘라 프랜시스 샌더스 《우아한 우주》 EATING THE SUN : Small Musings on a Vast Universe 심채경 옮김, 프시케의숲 2022 바쁘게 혹은 무심코 살아간다면 '우주'라고 해봤자 별것 아닌데─우주를 잘 몰라서 곤혹스러운 건 물리학, 지구과학 같은 과목 시험을 볼 학생 말고 또 있을까?─ 그 우주에 대한 글들을 써놓은 책이다. 어떻게? 이렇게, '신비롭게' '자세하게' '흥미롭게' '시적으로'. 이런 책을 보면, 나는 다시 책을 낼 기회가 찾아오면 이번에야말로 창의적으로 생각하고, 신중하게 정리하고 결정해서 독자들의 마음에 들도록 할 것을 생각하고 있지만, 이런 책 때문에─내가 책을 내기보다 우선 읽어야 할 책이 자꾸 나타나서─내가 책 내는 일을 시도할 시간이 남지 않을 것.. 2023. 12.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