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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앨리스 먼로 〈물 위의 다리〉죽음 앞에서 만난 사람
앨리스 먼로 소설 〈물 위의 다리〉 소설집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뿔 2007) 마흔넷 유부녀 지니가 캄캄한 밤에 웨이터 리키와 함께 있다. 처음 만난 사이이다. "보여 드릴 게 있어요. 아마 한 번도 보지 못한, 그런 걸 보여 드릴 게요." 그가 말했다. 이전이었다면, 이전의 정상적인 상태였다면 지금쯤 겁이 나기 시작했을 것이다. 사실 예전의 정상적인 그녀라면 애당초 이렇게 따라나서지도 않았겠지만. "호저예요?" 그녀가 물었다. "아뇨, 호저는 아니에요. 호저만큼 흔한, 그런 게 아니에요. 적어도 제가 아는 한은요." 1킬로쯤 더 가서였던가, 그가 전조등을 껐다. "별 보여요? 저기, 별이요." 그가 물었다. 그가 차를 세웠다. 처음에는 사방이 그저 고요로 가득한 것 같았지만 사실은 아주..
2021. 11. 28.
앨리스 먼로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
앨리스 먼로(소설집)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 뿔 2007 줄거리로 보면 의아하다 싶을 수 있다. 켄 부드르와 조헤너 패리가 결혼하는 데는 둘 사이에 구체적인 미움이나 우정, 구애, 사랑 같은 건 없었기 때문이다. 한심한 사내 부드르. 돈을 빌려주거나 빌리는 일로 늘 곤란을 겪는다. 아내 마르셀이 죽고 딸 새비서마저 장인 맥컬리 씨에게 맡겨 놓고는 이런저런 구실로 돈을 가져간다. 세월도 실없이 보낸다. 괜히 공군을 뛰쳐나왔고 주제넘게도 동료 문제로 비료 회사를 그만두었고 고용주에게 몸을 낮추지 않다가 보험회사에서도 쫓겨났다. 빌려준 돈 대신 허름하기 짝이 없는 호텔을 차지했는데 이 건물을 식당 겸 술집으로 개조하기 위해서 장인에게 또 돈을 좀 달라고 하지만 사실은 쓸모가 전혀 없어서 철거하는..
2021. 11. 22.
앨리스 먼로 《행복한 그림자의 춤》
앨리스 먼로 소설 《행복한 그림자의 춤》 곽명단 옮김, 뿔 2010 편하다. 읽으면서 내가 구태여 그 흐름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저절로, 알아서,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그런 느낌이다. 「떠돌뱅이 회사의 카우보이」는 시골 구석구석을 누비는 외판원 아버지지 이야기다. 감기약, 철분 영영제, 티눈 약, 변비약, 부인병에 좋은 알약, 구강 청결제, 샴푸, 로션제와 연고, 레몬과 오렌지와 라즈베리 따위의 음료용 농축액, 바닐라 향료, 식용 색소, 홍차와 녹차, 생강, 정향유 따위의 양념들, 그리고 쥐약 같은 것들을 판다. 아버지는 이런 노래를 지어서 부른다. 티눈 약부터 부스럼 약까지 연고라면 갖가지 다 있습니다...... 그 아버지가 어느 날 딸을 데리고 트럭에 올랐는데 장사는 되지 않았고 돌아오는 길에 예전에..
2021. 9.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