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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서정주8

三月에 내리는 눈 저 허름한 비닐창으로 폭설이 내리는 걸 보며 식사를 했습니다. 팔당이라는 곳이었습니다. 폭설이 내리는데도 사람들은 걱정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식사가 더 즐거운 것 같았습니다. 비가 진눈깨비로 바뀌었고 금방 또 폭설이 내리는 것이었는데 지상의 기온이 영상이어서 내리는대로 거의 다 녹았습니다. 잠깐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金春洙)이 생각났지만 먹는데 정신이 팔려 곧 잊었습니다. 돌아오는 길은 눈은커녕 쨍쨍한 곳이 한참 동안 이어졌는데 우리 동네에 들어오자 또 눈이 내렸습니다. 이번에는 싸락눈이어서 차창에 부딪친 눈이 작은 유리구슬처럼 폴짝폴짝 뛰었습니다. 이번에는 "싸락눈 내리어 눈썹 때리니"가 생각났습니다(『徐廷柱詩選』(1974, 민음사 세계시인선 ⑫), 111쪽). 생각만 했지 그 얘기를 하진 않았.. 2019. 3. 23.
서정주 「귀촉도 歸蜀途」 歸 蜀 途 눈물 아롱 아롱 피리 불고 가신님의 밟으신 길은 진달래 꽃비 오는 西域 三萬里. 흰옷깃 염여 염여 가옵신 님의 다시오진 못하는 巴蜀 三萬里. 신이나 삼어줄ㅅ것 슲은 사연의 올올이 아로색인 육날 메투리. 은장도 푸른날로 이냥 베혀서 부즐없은 이머리털 엮어 드릴ㅅ걸. 초롱에 불빛, 지친 밤 하늘 구비 구비 은하ㅅ물 목이 젖은 새. 참아 아니 솟는가락 눈이 감겨서 제피에 취한새가 귀촉도 운다. 그대 하늘 끝 호을로 가신 님아 "다시오진 못하는 巴蜀 三萬里." "부즐없은 이머리털 엮어 드릴ㅅ걸." "그대 하늘 끝 호을로 가신 님아" …… 다른 말을 한다는 것이 부질없을 것입니다. 시인이 되어서, 시를 쓸 수 있었다면, 달랑 이 시 한 편만 썼다 해도 시인이 되었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다시오진 못하는.. 2015. 6. 15.
교과서의 작품 이야기 - 옥의 티 "문우(文友)"라고 하면 좋겠지만, 나는 아무것도 아닌 그냥 보통 사람이어서 흔히 하는 말로 "아는 사람", 그러니까 지인(知人)이 쓴 글입니다. 계간지 《교과서 연구》(79호, 2015.3.1)에 실렸습니다. 옥의 티 김 원 길(시인, 안동지례예술촌장) 내가 우리말 현대시를 처음 만난 때는 중학교 1학년 국어 시간이었던 것 같다. 갓 입학하여 며칠 안 된 봄날에 우리들은 박목월의 시를 배우며 우리 시가 지닌 율조의 아름다움에 반하고 말았다. 머언 산 청운사 낡은 기와집 산은 자하산 봄눈 녹으면 느릅나무 속잎 피어가는 열두 구비를 청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 ('청노루' 전문) 율조가 좋은 시는 쉽게 읽히고 잘 읽히는 시는 뜻이 좀 어려워도 잘 외워진다. 실제로 이 시에서 "…… 열두 구비를 / 청노루.. 2015. 4. 14.
조지훈 「석문石門」 "신부는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겨우 귀밑머리만 풀리운 채 신랑하고 첫날밤을 아직 앉아 있었는데, 신랑이 그만 오줌이 급해져서 냉큼 일어나 달려가는 바람에 옷자락이 문돌쩌귀에 걸렸다"고, "그것을 신랑은 생각이 또 급해서 제 신부가 음탕해서 그 새를 못 참아서 손으로 잡아당기는 거라고, 그렇게만 알고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 버렸다"고, "문돌쩌귀에 걸린 옷자락이 찢어진 채로 오줌 누곤 못 쓰겠다며 달아나 버렸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사십 년인가 오십 년이 지나간 뒤에 뜻밖에 딴 볼일이 생겨 이 신부네 집 옆을 지나가다가 그래도 잠시 궁금해서 신부방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신부는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밤 모양 그대로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 있었다"고,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 2014. 5. 18.
서정주 「신부」 신부 신부는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겨우 귀밑머리만 풀리운 채 신랑하고 첫날밤을 아직 앉아 있었는데, 신랑이 그만 오줌이 급해져서 냉큼 일어나 달려가는 바람에 옷자락이 문돌쩌귀에 걸렸습니다. 그것을 신랑은 생각이 또 급해서 제 신부가 음탕해서 그 새를 못 참아서 손으로 잡아당기는 거라고, 그렇게만 알고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 버렸습니다. 문돌쩌귀에 걸린 옷자락이 찢어진 채로 오줌 누곤 못 쓰겠다며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사십 년인가 오십 년이 지나간 뒤에 뜻밖에 딴 볼일이 생겨 이 신부네 집 옆을 지나가다가 그래도 잠시 궁금해서 신부방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신부는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밤 모양 그대로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 2014. 5. 13.
「싸락눈 내리어 눈썹 때리니」&「설중여인도(雪中女人圖)」 재작년 2월 둘째 주 어느 날, 블로그 『강변 이야기』의 작품 싸락눈 내리어 눈썹 때리니 싸락눈 내리어 눈썹 때리니 그 암무당 손때 묻은 징채 보는 것 같군. 그 징과 징채 들고 가던 아홉 살 아이…… 암무당의 개와 함께 누릉지에 취직했던 눈썹만이 역력하던 그 하인 아이 보는 것 같군. 보는 것 같군. 내가 삼백 원짜리 시간 강사에도 목이 쉬어 인제는 작파할까 망설이고 있는 날에 싸락눈 내리어 눈썹 때리니……. 『徐廷柱詩選』민음사 세계시인선 ⑫, 1974, 111. 설중여인도(雪中女人圖) 김원길 저 눈 좀 보아, 저기 자욱하게 쏟아지는 눈송이 좀 보아 얼어 붙은 나룻가의 눈 쓴 소나무와 높이 솟은 미루나무 늘어선 길을 눈 속에 가고 있는 여잘 좀 보아. 내리는 눈발 속에 소복(素服)한 여인의 뺨이 보이네.. 2013. 12. 1.
그리운 눈 올해는 눈이 많이도 내립니다. 눈 온 뒤 기온이 내려가고 바람이 불면 죽을까봐 나다니기가 조심스럽습니다. 길이 미끄러운 건 기본이고, 몸이 시원찮은 사람은 영 끝장나는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그래서 죽었다는 기사를 본 적도 있습니다. 옛날에 못 살 때는 눈이 오면 들어앉아 있으면 그만이었지만, '잘 사는 나라'가 된 후로는 아무리 눈이 많이 오고 세찬 바람이 불어도 갈 데는 가고 만날 사람은 만나야 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잘 사는 나라'가 된 후로는 눈이 많이 내리면 마음이 무거워질 때가 많습니다. ♬ 휴일에 내리는 눈을 내다보고 있으면 아늑한 느낌을 줍니다. 그럴 때는 걸핏하면 예전의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의 시(詩)가 생각납니다. …… 겨울밤입니다. 시골 초가집에 눈이.. 2013. 1. 6.
선운사에 가보셨습니까? 성복 학부모님께 드리는 파란편지 선운사에 가보셨습니까? - 아이들을 데리고 나갈 땐 어떻게 하십니까? - 아이들이 오지 않는 학교는 조용합니다. 저에게는 그들이 재잘거리고 떠들어대는 소리가 음악보다 낫기 때문이어서 그런지 그렇게 조용한 학교가 그리 좋은 느낌을 주지는 않습니다. 지금쯤 우리 아이들은 어디로 가 있을까요? 집에도 있겠지만, 시골이나 제주도, 설악산, 불국사 같은 곳에도 가 있고, 몇 명은 다른 나라의 어느 곳을 돌아다니고 있겠지요. 모두들 무엇을 보고 듣고 이야기하든 무엇인가 배우며 건강하게 지내기 바랄 뿐입니다. '선운사'라는 제목의 시를 보았습니다. 서정주가 다 버려놓고 간 절. 지난 봄 노근하게 동백꽃에 낮술을 먹이고, 한껏 육자배기 가락이나 뽑던 절. 고창에는 다시 오지 말자. 법당.. 2007. 8.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