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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서대경3

서대경 「굴뚝의 기사」 굴뚝의 기사 서대경 뿌연 형광등 불빛. 머리 위로 살금살금 기어가는 소리. 서대경 씨는 쓰던 글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천장을 노려본다. 천장의 벽지가 갈라지더니 머리 하나가 불쑥 나온다. 「혹시 꼬마 놈 하나 못 봤소?」 머리가 말한다. 「꼬마 놈이라니 누구 말이오?」 「굴뚝의 기사 말이오.」 「당신은 누구요? 왜 굴뚝의 기사를 찾소?」 「옆방 사는 사람인데, 그놈이 또 내 담배를 훔쳐 갔소. 천장에 구멍이 뚫린 걸 보니 형씨도 그놈한테 당했나 보구려.」 「그까짓 담배 없어진 걸로 남의 방에 함부로 머리를 들이밀어도 되는 거요?」 머리가 천천히 돌면서 방 안을 살핀다. 「그러니까 정말로 못 봤소?」 서대경 씨는 말없이 머리를 노려본다. 「그럼 담배 한 개비만 얻을 수 있소?」 서대경 씨가 책상 위의 책을.. 2017. 5. 12.
서대경 「까마귀의 밤」 까마귀의 밤 서대경 헌책방 구석 책 무더기 속에 파묻혀 있는 작은 책상 위에 웅크려 있던 백발의 노인이 잠에서 깨어나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린다. 문 닫을 시간이야. 노인의 왼쪽 눈이 소리친다. 벌써 어두워졌군. 노인이 입가의 침을 닦으며 중얼거린다. 문 닫을 시간이라고. 알아. 노인이 대답한다. 노인은 의자에서 일어나 퀴퀴한 냄새를 풍기는 책장들 사이로 난 비좁은 통로를 걸어간다. 영업시간이 끝났으니 내일 다시 오시오! 노인의 목소리가 텅 빈 공간에 메아리친다. 노인은 산발한 머리를 갸우뚱하며 오른쪽 눈이 깨어나길 기다린다. 일어나. 게으름뱅이야! 노인은 춤을 추듯 몸을 앞뒤로 건들거리며 자신의 책상으로 돌아간다. 노인은 책상 위에 놓인 원고 뭉치를 내려다본다. 노인은 원고를 집어 든다. 밤길 걷는 사.. 2015. 9. 16.
서대경「천사」 천 사 서대경 성탄절 밤이었다. 그녀는 빈방의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누군가 그녀의 방 창문을 가만히 두드리고 있었다. 나직하게 울리는 그 소리는 이상하도록 친근하고 포근했다. 그녀는 일어서서 홀린 듯 창가로 다가갔다. 자신의 방이 아파트 12층에 위치해 있다는 사실은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창을 열자 얼음 무더기가 쏟아지듯이 눈부신 냉기를 뿜으며 한 사내가 방 안으로 떨어져 내렸다. 허연 김이 피어오르는 그의 몸에서 어두운 눈보라의 냄새가 풍겼다. 그녀는 기이한 정적에 휩싸인 채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사내 곁에 서 있었다. 눈을 감은 그의 얼굴은 창백했다. 그녀는 그의 정체를 묻지 않았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녀는 멍한 시선으로 푸르스름한 어둠 속에서 경련하듯 떨고 있는 그의 앙상한 등.. 2013. 7.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