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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박상수4

박상수 「오래된 집의 영혼으로부터」 하나, 둘, 셋, 잘 아는 신발들이 모여 있어요 속초 바다의 모래가 묻어나는, 캔버스화 한 켤레는 젖어 있고요(곧 아궁이 옆에서 살살 말려볼 예정), 보라색 작은 단화는 뒤축이 접힌 채 가지런하네요 오는 동안에 스르륵 발이 자라고 있었을까요(그럴 리가요), 굽 높은 운동화 한쪽은 뒤집어진 채로 멀리 달아나 있어(제일 먼저 뛰어 들어간 사람의 것) 큭큭 제가 몰래 주워 왔어요, 보세요, 세 칸짜리 시골집 풍경입니다 방은 두 개, 문턱은 높고 고개를 숙인 채로 넘어 다녀야 해요 머리 조심! 앤티크한 뒤창을 열면 장독대와 돌담과 눈 덮인 겨울 나무들, 당겨놓은 듯 가까이 있어 다 같이 소리를 질렀지요 오른쪽 끝 방에는 흰색 타일로 장식한 입식 부엌을 들였고요 보일러 스위치는 냉장고 옆에, 방마다 어떤 이들이 .. 2025. 2. 26.
이제니 「발견되는 춤으로부터」 발견되는 춤으로부터 이제니 멀리 성당의 첨탑에서 저녁 미사를 알리는 종소리 들려온다. 열린 창 너머로 어스름 저녁 빛 새어 들어오고 마룻바닥 위로 어른거리는 빛. 움직이면서 원래의 형상을 벗어나려는 빛이 있다. 어디로든 갈 수 있다고 속삭이는 옛날의 빛이 있다. 사제는 한 그릇의 간소한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가장 낮은 자리로 물러나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린다. 화면은 다시 정지된다. 일평생 봉쇄 수도원의 좁고 어두운 방에 스스로를 유폐한 채 기도에만 헌신하는 삶. 너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그 기도가 누구를 도울 수 있는지 묻는다. 화면은 다시 이어진다. 너는 책상으로 가 앉는다. 맞은편에는 비어 있는 의자. 비어 있음으로 가득한 의자. 책상 위에는 먼 나라에서 보내온 엽서가 놓여 있다... 2022. 2. 5.
박상수 「윤슬」 윤슬 박상수 있을게요 조금만 더 이렇게, 모래에 발을 묻어두고 저녁이 오기를 기다리며 여기 이렇게 있을게요 끝에서부터 빛은 번져오고, 양털구름이 바람을 따라 흩어지다가 지구가 둥그렇게 휘어지는 시간, 물들어오는 잔 물결, 잘게 부서진, 물의 결,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나는 그냥 여기 앉아 있어요 머리칼을 날리며 사람들은 떠나가고 아이들도 돌아가면 누가 놓고 간 오리 튜브가 손을 놓친 듯 멀리 흘러가고, 여기까지인가 봐, 그런 생각, 뭐야 그런 생각하지 마, 혼자 건네고 받아주는 농담들, 그래야 나는 조금 웃을 수 있어요 지난겨울에는 졸참나무랑 벚나무 장작을 가득 태우며 앉아 있었어요 내가 나로부터 풀려나는 시간, 그때도 눈 속을 이글거리며 혼자 앉아 있었구나 글레이즈 가득 얹은 도넛과 커피를 마시며 내가 .. 2021. 11. 1.
시가 너무 쉬워서 미안할 때가 있다는 시인 요즘 시가 해독 불가 수준의 난해함을 띠는 것에 당위성이 있는가? '시인수첩'(계간)이 마련한 좌담회(의미 : 우리 시가 나아갈 방향 모색―요즘 시가 해독 불가 수준의 난해함을 띠는 것에 당위성이 있는가?) 기사를 발췌해보았다. 대화체 문장은 신문에 실린 그대로 옮겼다. ●은 허영자(78) 시인의 견해 ○은 박성준(30)·박상수(42) 시인의 견해 ● "서투름을 시적 모호함으로, 무질서와 난삽함을 새로운 기술로 내세운다면 우리 시단에 독(毒)이 되지 않을까?" ○ "각자의 영역에서 서로 다른 문학을 하고 있지만 이런 기형성에 역기능만 있는 게 아니다." ● "함축과 운율, 정제된 형식을 통해 혼돈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 시" ○ "시는 불완전한 것" "시를 쓰는 데 전문성이 필요한지도 의심스럽다" ● ".. 2016. 9.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