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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박상수 「오래된 집의 영혼으로부터」
하나, 둘, 셋, 잘 아는 신발들이 모여 있어요 속초 바다의 모래가 묻어나는, 캔버스화 한 켤레는 젖어 있고요(곧 아궁이 옆에서 살살 말려볼 예정), 보라색 작은 단화는 뒤축이 접힌 채 가지런하네요 오는 동안에 스르륵 발이 자라고 있었을까요(그럴 리가요), 굽 높은 운동화 한쪽은 뒤집어진 채로 멀리 달아나 있어(제일 먼저 뛰어 들어간 사람의 것) 큭큭 제가 몰래 주워 왔어요, 보세요, 세 칸짜리 시골집 풍경입니다 방은 두 개, 문턱은 높고 고개를 숙인 채로 넘어 다녀야 해요 머리 조심! 앤티크한 뒤창을 열면 장독대와 돌담과 눈 덮인 겨울 나무들, 당겨놓은 듯 가까이 있어 다 같이 소리를 질렀지요 오른쪽 끝 방에는 흰색 타일로 장식한 입식 부엌을 들였고요 보일러 스위치는 냉장고 옆에, 방마다 어떤 이들이 ..
2025. 2. 26.
박상수 「윤슬」
윤슬 박상수 있을게요 조금만 더 이렇게, 모래에 발을 묻어두고 저녁이 오기를 기다리며 여기 이렇게 있을게요 끝에서부터 빛은 번져오고, 양털구름이 바람을 따라 흩어지다가 지구가 둥그렇게 휘어지는 시간, 물들어오는 잔 물결, 잘게 부서진, 물의 결,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나는 그냥 여기 앉아 있어요 머리칼을 날리며 사람들은 떠나가고 아이들도 돌아가면 누가 놓고 간 오리 튜브가 손을 놓친 듯 멀리 흘러가고, 여기까지인가 봐, 그런 생각, 뭐야 그런 생각하지 마, 혼자 건네고 받아주는 농담들, 그래야 나는 조금 웃을 수 있어요 지난겨울에는 졸참나무랑 벚나무 장작을 가득 태우며 앉아 있었어요 내가 나로부터 풀려나는 시간, 그때도 눈 속을 이글거리며 혼자 앉아 있었구나 글레이즈 가득 얹은 도넛과 커피를 마시며 내가 ..
2021. 11.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