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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박남원6

박남원 「가을 항구에서」 가을 항구에서 돌아오라 아직 돌아오지 않은 자들아. 어쩌면 지금쯤 바람이 된 자들아. 흰 구름이 된 자들아. 언젠가 노을이 되어 떠나간 자들아. 아니, 아니 저 수심 깊은 곳에서 끝내 아직도 살아 울고 있는 자들아. 온 세상 붉은 단풍을 몰고 온 가을 한 계절이 여기까지 찾아와 기어이 너희들 안부를 묻고 있질 않느냐. 박남원 시집 《사랑했지만 어쩔 수 없었던 어느 날》(b, 2021) 77. 시인은 이 시를 가을 내내 걸어두고 있었습니다. 나는 간절해졌습니다. 내 가을은, 시인의 블로그에서 이 시가 그대로 걸려 있는 걸 확인하는 가을이 되었습니다. 이제 가을이 갔으므로 나는 시인이 지난가을을 잘 보냈기를, 올겨울에도 잘 지내기를 바랍니다. 나는 이곳에서 늘 그렇게 지냈으므로 오래 머물기보다 서둘러 나의 .. 2023. 11. 10.
박남원 시인의 산문 "노벨상보다 빛나는 순금빛 상을 받다" 박남원 시인의 블로그 《시인의 집》에서 가져온 글입니다. 박 시인은 지난해 여름 시인 자신의 이야기와 함께 제 이야기도 해주셨습니다. 노벨상보다 빛나는 순금빛 상을 받다 제 시를 다소 과하게 칭찬해주시면서 제 시집을 소개해 주셨는데 보답글 하나 없이 지내는 것도 무례라는 생각으로 몇 자 적게 됩니다. 선생님께서 예전에 제 시 “내 안에 머물던 새”를 블로그에 올려주셨지요. 그런데 제 시 밑에 덧글로 적어 주셨던 지금까지 ‘상 받은 것도 없다는 시인’이라는 문구가 그때 이후 언제나 제 머리를 따라다녔습니다. 저는 평소에 상이라는 것 자체를 생각하며 살아보지를 못했습니다. 당연히 초등학교 2학년까지 우등상이나 개근상 몇 개 받은 것 빼고 이후로는 한 번도 상을 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시집 속에 “나에게 행복.. 2022. 11. 13.
박남원 《사랑했지만 어쩔 수 없었던 어느 날》 박남원 시집 《사랑했지만 어쩔 수 없었던 어느 날》 도서출판 b, 2021 거의 다 읽어 「죽림정사」「저 먼 별까지 혼자 걸어갈 테니」 두 편만 남은 걸 보자 가슴이 쿵쿵거리는 느낌이었다. '다 읽었네' '끝나버렸네' '이젠 뭘 해야 하지?' 건성으로 읽는다면 몇 페이지 되지 않아서 잠깐이겠지만 모처럼 혼이 빠져 있었다. 대서사시의 막이 내리는 느낌... 저 먼 별까지 혼자 걸어갈 테니 언젠가 나 죽어 내 영별식永別式장에는 굳이 바쁘신데 오실 일 없으시네. 살아 내내 외로움으로 지내는 동안 언제부턴가 외로움에 터를 잡게 되면서 마음 편히도 그렇게 살게 되었으니 마지막 외로움도 실은 해탈로 가는 한 길목 아닌가. 나 그간 잊고 지내던 이승의 노래 한 소절 목질의 목소리로 흥얼거리며 저 먼 별까지 혼자 걸어.. 2021. 7. 13.
박남원 「그 여자」 그 여자 ​ 맑은 가을 일요일, 망원경으로 멀리 있는 여학교 교정을 바라보다가 교실 안 여학생 하나가 렌즈 안으로 슬쩍 들어왔다. 다가오는 수능시험을 맞아 빈 교실에 공부를 하러 온 모양. 학생은 책을 읽고 있다. 잠시 후 책을 읽으며 머리칼을 슬쩍 뒤로 젖히기도 한다. 그러다간 이번엔 일어서서 멀리 창문 밖을 바라다본다. 그렇게 바로 코앞에 있는 듯. 태연히 시간이 흐르고, 세상엔 이제 그녀와 나, 단 둘 뿐이다. 그러게, 세월이 참 빠르긴 빠르다. 벌써, 이십 몇 년 그 여자 지금쯤 어디로 시집가서 아들 낳고 딸 낳고 잘 살고는 있는지. 박남원 시인의 블로그 《세상살이》(시집 「캄캄한 지상」문학과경계사 2005 절판)에서. 시인이 나를 아나? 나를 보고 시를 썼나? 말이 안 되지? 누군들 그리움이 없.. 2020. 7. 23.
「내 안에 머물던 새」 내 안에 머물던 새 박 남 원 내 안에 한동안 머물던 새는 반은 떠나고 반이 남았다. 그래서 다 떠나버린 것도, 다 남아 있지도 않은 네가 나를 아프게 한다. 꼭 반은 떠나고 반은 남았으므로 나는 온전히 너를 떠나보낸 것도 내 안에 온전히 잡아둔 것도 아니다. 어느 날 다 날아가라고, 다 날아가버리라고 대문을 열어두고 몇 날 며칠을 끙끙 앓았으나 그러면 다 떠나버릴 줄 알았던 너는 이번에도 단지 반만 떠나고 여전히 반은 계속 남아 있다. 다 떠나버리거나 내 안에 온전히 남아 있지 않은 너는 하루 종일 바람 부는 바다 기슭 같은 데를 이리저리 날아다니다가 해가 저물면 기어이 내 가슴의 문을 열고 날아 들어와 내 심장의 벽에 모이를 쪼며 밤새 쿡쿡쿡 바늘을 찔러댄다. 한번 와서는 어디로 가지도 않고 밤이 다.. 2017. 7. 8.
박남원 「그렇다고 굳이」 그렇다고 굳이 박남원 길을 가다가 우연히 만난 여자와 욕정에 이끌려 하룻밤을 잤다. 그럴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서 시간이 흐를수록 그래도 무언가 진지함이 필요할 것 같기는 해서 땀 흘리는 정사가 막 끝났을 때, 우리는 인간의 꿈과 희망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렇게 가끔 내 스스로에게 돌아오기는 했다. 가끔은 우리들 스스로에게 돌아오려고 노력하긴 했다. 그때마다 흔들리며 바람이 불었지만 그렇다고 굳이 울지는 않았다. "인간의 꿈과 희망"을 기억하는 70년대적 영혼이 아직도 살아 있단 말인가. "스스로에게 돌아오려고 노력"하는 이들이 아직도 있단 말인가. 이 창궐한 욕망과 욕정의 시간에, 촌스럽게도? 읽기에 따라 시 속의 "하룻밤"은 모든 타락한 세속적 삶의 은유로도 읽힌다. 희망과 .. 2010. 1.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