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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문정희5

문정희 「얼어붙은 발」 얼어붙은 발 ―문정희(1947∼ ) 큰 거울 달린 방에 신부가 앉아 있네 웨딩마치가 울리면 한 번도 안 가본 곳을 향해 곧 첫발을 내디딜 순서를 기다리고 있네 텅 비어 있고 아무 장식도 없는 곳 한번 들어가면 돌아 나오기 힘든 곳을 향해 다른 신부들도 그랬듯이 베일을 쓰고 순간 베일 속으로 빙벽이 다가들었지 두 발이 그대로 얼어붙는 각성의 날카로운 얼음 칼이 날아왔지 지금 큰 실수를 저지르고 있구나! 두 무릎을 벌떡 세우고 일어서야 하는 순간 하객들이 일제히 박수치는 소리가 들려왔지 촛불이 흔들리고 웨딩마치가 울려퍼졌지 얼른 엘리베이터를 타고 바람처럼 사라져야 할 텐데 이 모든 일이 가격을 흥정할 수 없이 휘황한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었네 검은 양복이 흰 손을 내밀고 있었네 행복의 문 열리어라! 전통이 웃.. 2022. 11. 9.
눈에 갇히지 않으려고 애쓰기 지난 일요일, 새벽까지는 눈이 내리지 않았습니다. "눈이 와?" "오긴 뭐가 와?" 아내가 퉁명스럽게 대답합니다. 이런..... 일기예보는 분명했으므로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전날 일찌감치 저곳에서 나왔기 때문에 눈이 내리지 않는 건, 눈이 내릴 거라면서 얼른 나가자고 재촉한 내 촌스러운 입장을 난처하게 했습니다. 아침이 되자 마침내(!) 눈이 내렸습니다. '보라고! 창밖 좀 내다보라고!' 나는 말없이, 소리없이 외쳤습니다. 그렇게만 해도 충분했습니다. 아내는 더 이상 퉁명스러울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게다가 눈은 한꺼번에 내렸습니다. 그러자 마음이 더 더 더 풀렸습니다. "서둘러 떠나시기를 잘 하셨습니다. 저도 서둘러 들어오기를 잘했습니다." 저곳으로 들어간 친구가 저곳으로부터 탈출해온 나에게 저.. 2020. 12. 15.
「선물 상자」 선물 상자 문 정 희 바다 건너 첫사랑이 보내온 선물 상자를 풀고 있을 때 설렘을 되도록 아끼며 천천히 풀고 있을 때 그사이 선물은 자꾸 커지고 커져 보석 궁전! 나는 그 궁전에 사는 공주 남은 생이여! 두근두근으로 이 궁전을 가득 채워도 좋으리 곧 다시 백마가 오고 백만장자가 오고 누추한 적군들 모조리 무너뜨리면 공주의 입술은 장미! 아침 이슬 깨어나는 마술 상자 속의 눈부심을 아시는지! 그런데 마침 그때 등 뒤에서 날카로운 가위가 나타나 싹둑! 하늘 아래 상자를 개봉해버린다 보석 궁전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으스스 삭풍이다 결혼식 후 수년을 함께 산 사람의 소행이 이래도 되는 것인가 반복할 수 없는 나의 첫사랑을 멋대로 열어버린 무지한 가위의 친절을 무어라 이름하는지? 제발 좀 가르쳐달라 단단히 포장된 .. 2019. 8. 13.
문정희 「도끼」 도 끼 문정희 도끼를 잘 쓰는 사내를 사랑한 적이 있다 불끈거리는 그의 팔이 허공을 빠르게 선회한 후 푸른 도끼날로 급소를 내리칠 때 태어나는 번개를 그 눈부신 냉소의 언어를 사랑한 적이 있다 그때 뜻밖에 나의 어깨에서 솟아나는 날개 도끼를 잘 쓰는 사내가 사랑하던 날개를 쩡쩡! 솟아나는 깃털을 하나의 리듬으로 시를 쓴 적이 있다 검은 젖을 빠는 입술 아, 덧없는 젖꼭지 일순 도끼로 내려쳐서 얼음 속 빗금에서 불꽃을 꺼내는 야생의 도끼가 내리친 급소의 언어를 번개와 리듬을 깊이 사랑한 적이 있다 ―――――――――――――――――――――――――――――――――――――――― 문정희 1947년 전남 보성 출생. 1969년 『월간문학』 등단. 시집 『새떼』 『찔레』 『남자를 위하여』 『오라, 거짓 사랑아』 『양귀비.. 2019. 1. 14.
문정희 「겨울 사랑」 겨울 사랑 문정희 눈송이처럼 너에게 가고 싶다 머뭇거리지 말고 서성대지 말고 숨기지 말고 그냥 네 하얀 생애 속에 뛰어들어 따스한 겨울이 되고 싶다 천년 백설이 되고 싶다 서울아산병원 사보(社報)에서 읽었습니다. 병원 뒤편 한강 그 하늘 위로 다시 이 해의 눈이 내릴 때 나는 중환자실에 갇혀 있었습니다. 멀쩡한(?) 사람들은 하루만에 벗어나는 그곳에서 3박4일을 지내며 평생을 아이들처럼 깊이 없이 살아온 자신을 그 풍경에 비추어 보았습니다. 그러자 그 눈송이들이 이번에는 마치 아이들처럼 내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 큰 건물 앞으로는 자동차와 사람들이 쉴새없이 드나듭니다. 어떤 '행복한' 사람은 담배까지 피우며 걸어다닙니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그 모습들은 무성영화 같습니다. 풍경에서 그리움이 피어오르기로.. 2010. 2.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