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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고요와 게으름

by 답설재 2026. 2. 1.

 

 
 
 
창밖의 풍경을 내다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할 일이 별로 없는 나날이다. 남들은 무슨 일인지 다들 분주하고 나만 가만히 앉아 있으면 불안하다. 남들은 편안한데 나 혼자 무슨 분주한 일을 하게 되면 화가 날까, 억울할까, 어쨌든 뭐 이런 경우가 있나 싶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농촌의 겨울을 좋아했다.
온 들판을 내다보고 있어도 지나가는 사람 하나 없고 그렇다고 자동차가 지나가지도 않는다.
개 짖는 소리나 송아지와 헤어진 소 울음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저 얼어붙은 들판에도 봄이 오겠지.
입춘(立春)이 내일모레다. 강추위 지나간 지 며칠 되지 않고 이제 추위가 없는 것도 아니겠지만 그래도 봄이 오고 그러면 또 무슨 일이든 해야 한다.
부담스럽고 걱정스럽다.
 
이 겨울, 조용한 날이 참 많았다.
그 여러 날들에 나는 뭘 했을까. 고요하게 앉아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수없이 많았다.
그 시간을 참지 못해 나는 뭔가를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일쑤였고, 그것조차 진득하게 하지 못해 라디오를 켜서 음악을 들었다.
나는 고요를 감당할 능력을 갖추지 못한 것이다.  
그 능력이 없어 수많은 날들을 헛되이 소비하고 허비하며 지낸다.
 
 
불전佛典은 예전에도 읽었습니다만 제가 우매하여 그 묘한 곳(妙處)을 통할 수 없었습니다. 홀로 때때로 불교의 쉬운 가설假說을 취해서 스스로 심령心靈의 번뇌를 씻었습니다. …… 불로佛老를 배우는 것은 본래 '고요'(靜: 마음을 고요하게 함)하고 '달관'(達)함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고요(靜)한 것은 게으름(懶)과 유사하고 달관(達)한 것은 방종(放)과 유사합니다. 그리하여 배우는 자는 간혹 미처 그 기대하는 바에 이르기도 전에 먼저 그 유사한 것(폐단)을 얻으니 그 해害가 없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소동파가 황주 유배지에서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그렇게 썼다(『소동파 평전』 왕수이자오, 돌베개 2013, 131).
소동파 주변에 나처럼 게으른 인간이 적어도 한 명은 있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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