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봐, 답설재, 자네 건강은 어때?"
"그럭저럭."
"그럭저럭?"
"두어 번 핏줄 막힌 건 뚫었잖아? 이런 걸로는 좋은 세상이지. 다시는 막히지 않도록 매일 아침 죽을 때까지 몇 가지 약을 먹으니까 됐고, 군데군데 괴로운 건 늘 그렇지. 이건 의사한테 가봐야 하겠구나 싶어도 웬만하면 그냥 지내. 귀찮잖아. 버티는 날까진 버텨보자 싶기도 하고......"
"돈은?"
"그럭저럭."
"뭐든 그럭저럭이군."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사실이야. 퇴임하고 사무실 나갈 때만 해도 아내에게 일일이 이야기하지 않고 쓸 수 있는 돈이 있어서 편리했는데, 지금도 일일이 허락받진 않지만 빤히 들여다보는 것 같긴 해. 물가도 많이 올랐잖아. 지난달엔 쓰고 몇만 원 남았는데 이달엔 많이 모자라고, 그런 식이지."
"왜 모자라?"
"몰라. 외식도 거의 하지 않는데도 병원 두 번 가는 달, 꼭 있어야 할 것 한두 가지 구입한 달, 제일 싼 걸로 샀는데도 아내 옷 한 벌 사준 달은 모자라."
"다른 일들은?"
"이제 다른 일들은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그대로 두고 보다가 가면 그만이다 싶어."
"......"
"......"
"그래, 그게 정답 같긴 해."
"내 힘으로, 내가 이렇게 살아 있어서, 주변에서 내 생각이 이러저러하다고 생각해 주어서...... 그러니까 내 힘으로 이루거나 해결될 일은 이제 없는 것 같아."
"섭섭해?"
"아니야! 천만에! 섭섭하지 않아. 젊었던 날엔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어. 많이 모으진 못해도 돈도 살아갈 만큼은 모아놓고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고, 수목장이 좋겠다 싶으면 그까짓 멋진 나무 한 그루 구하면 될 것 같았고, 아예 웬만한 산 하나 사도 될 것 같았고, 섭섭해하는 사람 있으면 좀 오라고 해서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고, 그동안 섭섭한 것 너무나 많은 아내와의 일도 일거에 눈 녹듯 해소할 수 있을 것 같았고, 사람들 만나면 밥은 무조건 내가 살 수 있을 것 같았고......"
"그만. 됐어."
"그랬는데 단 한 가지도 그렇지 않은 것 같아."
"그래, 섭섭하냐고?"
"아니라니까?"
"정말?"
"정말이라니까? 내게 남은 건 바로 그거야. 난 다, 모든 것 다, 이대로도 괜찮겠구나 싶은 거야. 까짓 거 이 상태로 해결된 것 같은 느낌이야. 안 되는 건 내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거니까. 그래야 고요히 지낼 수 있을 것 아닌가 싶기도 해. 찢어졌으면 찢어진 대로, 그러니까 포기는 아니지? 그 찢어진 가지로 물오르지 않으면 그만일 뿐이지. 그렇지 않아? 더는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일 아니라는 걸 나는 알아."
"......"
"......"
"그래, 그렇게, 그대로 살아가는 것이 용기일지도 몰라."
"괜찮아, 다 괜찮아. 용기가 아니면 어때. 그냥 사는 거야. 바보처럼."
"......"
"......"
"예전에 자네가 김상규 교수의, 강당 한구석의 그 허접한 거처에 서정주 시인의 시를 옮겨 써서 걸어준 일이 생각나.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국민학교 다닐 땐 하인이 끄는 백마 타고 등하교 하셨다는 분이 그 허접한 곳에서 학생들 운동할 때 쓰는 매트리스 깔고 누워 자면서 자네의 그 액자를 애지중지하셨지. 그러다가 가셨지. 그렇다고 그분이 주눅 들어서 살다 가신 건 아니었지......"
'내가 만난 세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큐멘터리 '동물의 왕국' (5) | 2025.03.30 |
---|---|
폭설을 믿어주기 바란다 (13) | 2025.03.29 |
사라져버린 안동 '지례예술촌' (0) | 2025.03.26 |
살아 있는 것이 무안해질 때 (11) | 2025.03.25 |
강아지의 3단계 행동 (4) | 2025.03.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