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별들의 고향"(최인호) 여주인공은 예쁘고 명랑한 여인 오경아다.
뭇 남자들 등쌀에 불우하게 살다가 자살한 오경아, 그녀에게는 전차표, 극장 관람권, 단추, 머리핀, 그림엽서, 우표, 홍보용 성냥갑, 녹슨 못, 포장끈, 전기세 영수증, 아파트 관리비 영수증, 부러진 우산대... 같은 자질구레한 물건들을 보관하는 버릇이 있다.
1970년대에 상업주의 소설이라고 하던 그 소설에서 이야기한 것들은, 당시로는 거의 다 상식이었겠지만 이 버릇 얘기는 내게는 특별했다.
몇 달간 오경아와 동거한 적이 있는 대학 미술 강사 김문오는 이렇게 얘기했다(1권, 173~174).
처음에 나는 그녀에게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을 하느냐고 의아해하자, 그녀는 일단 못 쓰게 된 것일지라도 언젠가는 쓸모가 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비록 철 지나고 낡은 것이라 할지라도 모두 두어야 한다고 강조했던 것이다.
그녀의 이런 예언은 적중하였고, 양복의 단추가 떨어지면 그녀의 단추함을 찾아보면 같은 모양의 단추를 찾아낼 수 있었으며, 포장했던 끈으로는 빨랫줄을 맬 수 있는 편리함을 깨달았던 것이다.
이런 수집벽은 그녀의 용의주도한 준비성 탓도 있지만 그녀의 천성적인 늘 최악의 경우를 상상하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녀는 바보같이 언제나 사건에 부딪칠 때마다 최악의 경우까지 상상하고 그것에 불안해했던 것이다.
그녀를 하루 종일 사로잡는 것은 문을 꼭꼭 잠갔는가, 곤로 심지를 낮추고 완전히 껐는가, 수도를 꼭 잠가 불필요한 물이 새지 않는가, 담배 피우려고 그었던 성냥불은 완전히 껐는가라는 따위의 언뜻 생각하면 무모한 정신 낭비의 생각에 몰두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이소에 가면 웬만한 것들은 1000원, 2000원에 다 살 수 있다.
그런데도 무언가를 여기저기 모아두고 산다. 어쩌다 한 번 어디 둔 물건으로 때우게 되면 무슨 큰 일 한 가지를 이루어낸 듯한 성취감과 즐거움을 느낀다.
궁상?
'그렇거나 말거나'다.
궁상이면 어때. 나의 삶도 거의 최악이었다. 나는 지금도 최악 속에 있는데 내가 그걸 모르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면 어때! 이제 거의 끝장인데.
우스운 일이 있어도 곧 전혀 우습지 않은 일이 이어질 것을 생각해야 했고, 울고 싶은 일이 있으면 이보다 더 기막힌 일이 있으면 '그땐 어떻게 하려고?' 생각했다.
돈이 좀 생기면 이미 꼭 써야 할 데가 수두룩해서 오히려 주머니에 들어온 돈 때문에 갈팡질팡했는데, 나를 바라보던 '인간'(사람)들은 가깝거나 멀거나 이제 다 떨어져 나갔다. 그렇게도 단물을 빨아먹으려고 하던 뭇 사내들이 망가진 경아를 외면했듯이 빨아먹을 것이 없게 되자 부담스럽기만 하겠지?
말하자면 나는 용도가 폐기된 인간이 된 것이지만 딱 한 가지, 속은 시원하다. 돈을 벌 땐 나를 바라보는 인간들이 나의 꼭 열두 배였고, 이제 돈을 벌 수가 없게 되자 딱 두 사람, 나와 내 아내만 남았다.
나는 그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이제 떠나도 된다, 내가 떠나게 된 것을 아쉬워할 인간은 단 한 명도 없게 되었다는 얘기구나 싶어 한다.
나는 아직 자살은 하지 않았고, 굳이 자살까지 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어쨌든 '최악의 경우'를 염두에 두는, 털어놓고 이야기하기가 창피하지만 주변 인물들 때문에 완전히 망가지고 지쳐버린, 그런 면에서는 경아의 친구다. 그렇게 지쳐서 죽은 경아는 내 친구다.
최소한 나는 '경아족(族)'이다.
이런 얘기는 처음 해본다. 해도 괜찮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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