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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낙엽 쌓인 뒷뜰

by 답설재 2023. 11. 8.

 

 

 

낙엽이 쌓인 걸 보면 이철하(李澈夏) 장학사가 떠오른다. 호리호리한 몸매에 술을 좋아한 분이었다. 남의 술 얻어먹는 걸 좋아한 것이 아니라 마셔도 되겠다 싶은 술을 조용히 즐겁게 마시는 멋쟁이였다. 권위주의가 예사로운 시절이어서 권위주의적이지 않은 그가 오히려 유별나 보였다.

그 장학사가 우리 학교를 방문하게 되었다.

 

1971년 가을이었지? 그땐 학교에 장학사가 나온다 하면 지금보다 훨씬 더 야단이었다. 한 달쯤 전부터 걸핏하면 대청소를 했고, 수업을 단축하고 그만하면 됐지 싶은 유리창을 닦고 또 닦았다.

장학사의 학교 방문은 봄에 계획을 보려고 한 번, 가을에 실적을 보려고 한 번이 정기적인 방문이었고 특별 방문은 거의 없었으니 교장·교감으로서는 연중 가장 신경 쓰이는 일이었을 것이다.

우리 반(6학년 1반)은 구관과 신관 사이 뜰 청소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봄·여름엔 걱정거리가 없는 곳이었다. 수십 그루 나무들은 푸르를 대로 푸르렀고, 어쩌다가 두셋 여학생들이 그 그늘을 찾았지만 어지럽히지는 않았다.

청소를 맡은 아이들은 그곳에서 실컷 놀다가 내가 지나가면 청소 다 했다고 했고 나는 "가거라~" 하면 그만이었다.

 

드디어 하루 전 오후, 긴장감이 감돌았다. 교사들은 교장·교감의 부탁이 없어도 긴장해서 걱정스러운 얼굴로 돌아다녔고 이젠 될 대로 돼라 싶은 느낌도 있었다.

 

그 시간도 어김없이 흘러 퇴근 준비를 하려고 교실로 가고 있는데 어? 어둑어둑해진 뒤뜰 나무그늘에 서너 명 아이들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녀석들은 지칠 대로 지쳐 말없이 서 있다가 낙엽이 떨어질 때마다 그걸 줍고 있었다.

기가 막혔다.

누가 말리지 않으면 내일 아침 날이 밝아서 장학사가 올 때까지 그러고 있을 작정인 것처럼 보였다.

"가!"

"......"

"얼른 가!"

녀석들은 처음에는 내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래도 되나?' 하는 표정이었다. '선생님이 어쩌려고 저러지?'

하기야 장학사가 온다지 않는가!

교장·교감 성적을 매기는 무섭고 대단한 사람 아닌가!

나중에 나는 교육청이 아니라 교육부에 들어가 장학사(연구사)를 거쳐 장학관을 지냈다. 그런데도 대전에서 체육교사로 정년퇴임한 A 씨는 요즘 나를 만나면 큰 소리로 "장학사님!" "장학사님!" 하고 부른다. 그는 내 친구 B에게는 꼬박꼬박 "교장선생님"이라고 부르고 나에게는 직급으로 보면 분명 교장 아래인 "장학사님"이라고 부르지만 나는 그 호칭을 감수하고 있다. '저분은 평생 교직에 있으면서 장학사를 얼마나 두려워했을까... 장학사에게 쩔쩔매는 교장·교감을 수없이 봤겠지...'

 

이튿날 아침, 교장·교감은 교사들을 모아 조용히 부탁했다. 일체의 활동을 중단하고 수업에만 전념하라고, 수업을 잘해야 한다고, 수업 잘 못하면 청소를 유리알처럼 해놓아도 다 헛일이라고...

그렇지, 그렇긴 하지! 그렇지만 한 달 전부터 그렇게 부탁할 것이지. 이제 와서 수업이 제일이라고? 어처구니없는 일 아닌가!

그 부탁을 듣고 교실로 가는데, 무심도 하지, 우리의 그 '뒤뜰'에는 밤새 낙엽이 수북하게 쌓였다. '저게 눈이라면 발이 푹푹 빠지겠구나...'

 

어떻게 시간이 갔는지, 장학사는 우리 반에도 들어와 수업 장면을 좀 보더니 교장·교감에게 뭐라고 이야기를 했고 교장·교감은  그의 말을 경청하며 연신 머리를 끄덕였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모두들 교무실에 모여 장학사의 인사말과 부탁을 들었고 장학사는 곧 돌아갔는데 교감이 나를 보고 씩 웃었고, 그 옆에서 누군가 "뒤뜰 청소당번이 딴 사람이었다면 지금쯤 죽었겠지?" 했고, 또 누군가는 이 장학사가 교장·교감과 함께 그 뒤뜰을 한참 동안 바라보며 "아이들이 저런 걸 봐야 생각도 깊어지고 시도 쓰고 할 텐데 방문한 학교마다 저 고운 나뭇잎 구경하기가 어려웠다."고 하며 좋아했다더라고 전해주었다.

 

나는 이철하 장학사와 친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었고, 그렇게 되어 이철하 장학사와 친해졌는데 그분은 곧 다른 곳으로 전근을 가버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돌연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후 딱 한 번 고인이 없는 댁을 물어물어 찾아가 잠깐 그 부인을 만나 고마움을 표한 적이 있었다.

 

나는 젊은 시절에는 이런저런 도움을 많이 받으며 살았는데 그런 분들에 대해 감사의 인사를 해본 적이 없다.

생각하면 참으로 박복(薄福)한 일이다. "고맙다" "고마웠다"는 말을 듣는 건 별것 아니다. 허망한 일이다. 이쪽에서 "고맙다" "고마웠다"는 말을 하는 것이 복된 일이다.

그 말을 꼭 해주어야 할 사람은 많았는데 이미 저승으로 떠났거나 행방을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남은 사람은 둘? 셋? 그분들에게라도 인사하며 지내는 데 신경을 써야겠다.

그것도 서둘러야 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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