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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성희의 생각, 성희 생각

by 답설재 2022. 6. 8.

 

 

 

성희는 이 서방을 데리고 와서 저 언덕에 야생화 씨앗을 흠뻑 뿌렸습니다.

이 서방은 애초에는 메밀 씨를 뿌리자, 하얀 달밤에 메밀꽃 핀 모습을 내다보면 얼마나 좋겠느냐고 했었습니다.

노인은 겨울밤에도 메밀꽃이 피어 있는 장면을 그려보고 있었습니다.

노인은 꿈이나 꾸면서 살아가면 좋을 것 같았습니다.

성희도 이 서방도 초췌해진 노인이 꽃을 심고 잡초를 뽑는다고 끙끙거리는 건 별로 보기 좋은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꽃씨를 뿌리는 날, 그들은 잡초가 나더라도 웬만하면 그냥 두라고 했습니다.

보기 좋은 잡초도 있다고 했습니다.

 

지난해엔 저 언덕이 수레국화 천지가 되었습니다.

그걸 보고 어떤 사람은 속으로 뭐 이런가 했겠지만 어떤 사람은 드러내어 "장관이네!" 했습니다.

병약한 노인은 '장관(壯觀)'이라고 하는 사람 말만 마음에 두면서 흐뭇하고 뿌듯했는데 한여름에 태풍이 불어오니까 수레국화 무리가 이리저리 쓰러졌고 이내 썩어갔습니다.

그걸 베어내느라고 끙끙거렸습니다.

 

겨울이 되자 왜 농사를 짓지 않았느냐고, 관청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노인은 성희에게 저 언덕을 블루베리 나무로 뒤덮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블루베리가 열려서 새들이 따먹고 남으면 그걸 따먹겠다고 했습니다.

성희도 노인의 아내도 "블루베리 나무로 뒤덮다니, 그럴 필요 없다, 나중에 블루베리 나무가 크면 굉장하다"고 했습니다.

겨울이 가자 성희가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듬성듬성  크고 작은 블루베리 나무를 심었습니다.

 

노인은 올해도 갈등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블루베리 나무가 크는 것도 보기 좋고 수레국화 무리가 세상을 뒤덮게 할 수는 없지만 저 언덕이라도 뒤덮게 하고 싶기 때문이었습니다.

저~ 쪽 회화나무 곁에 가면 수레국화 무리가 자신의 왜소한 모습을 숨겨줄 것 같았습니다.

그렇지만 수레국화 무리가 블루베리 주변까지 침범해서 저 언덕이 수레국화 밭인 지 블루베리 밭인 지 뭐가 뭔지 모르게 되어버렸습니다.

수레국화 생각을 하면 그러거나 말거나 그냥 두어버리고 싶은데 블루베리가 '그럼 난 뭐지?' 하고 섭섭해할 것 같았습니다.

 

병약한 노인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수레국화 씨앗도 뿌리고 블루베리 나무도 심어준 아름답고 마음 약한 성희를 그리워하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