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꼭 그렇다고는 할 수 없지만 한때, 아니 오랫동안 문서 더미에 둘러싸여 지내면 행복할 것 같았습니다. 그렇다고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는 건 아닙니다. 지금도 그렇게 지내는 사람을 부러워하긴 합니다.
W. G. 제발트의 소설 『토성의 고리』를 읽고 있는데 '진도'가 나가지를 않습니다. 읽은 데를 또 읽고 또 읽고 하니까 그렇습니다. 이상도 하지요, 그런데도 짜증이 나거나 하지 않고 새로 읽을 때마다 뭘 좀 더 파악하게 되는 것이 재미있고 신기합니다.
1장에서 다음 부분을 보고 여기에 옮겨두고 싶었습니다.
나는 저녁 무렵에 재닌의 사무실에서 플로베르의 세계관에 대해 그녀와 자주 이야기를 주고받았는데, 거기엔 강의를 위한 메모와 편지, 온갖 종류의 문서들이 엄청나게 널려 있어서 종이의 홍수에 파묻힌 기분이었다. 그 놀라운 종이의 집적이 시작된 곳이자 집중된 곳이기도 한 책상 위에는 차츰 산과 계곡이 있는, 종이로 이루어진 번듯한 풍경이 생겨났는데, 이 풍경의 가장자리는 바다를 만난 빙하처럼 뚝 끊어졌고, 그 주위의 바닥에는 은연중에 사무실 한가운데로 이동해 가는 새로운 퇴적층이 형성되었다. 책상 위에 끝도 없이 쌓여만가는 종이 때문에 재닌이 다른 책상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게 된 것도 벌써 여러 해 전의 일이었다. 책상을 옮길 때마다 비슷한 축적과정이 번복되었는데, 이 책상들은 종이로 이루어진 재닌의 우주의 후기 발전단계를 보여주는 셈이었다. 바닥의 양탄자도 겹겹이 쌓인 종이들 밑으로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고, 허리춤까지 쌓였다가 다시 바닥으로 가라앉던 종이는 마침내 벽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벽 또한 한쪽 모서리에만 압정을 박아놓은, 일부는 촘촘히 겹쳐진 전지(全紙)와 문서로 문 위쪽까지 빽빽하게 뒤덮여 있었다. 책장 안의 책 위에도 빈틈만 있으면 종이뭉치가 빼곡히 들어찼고, 어스름이 내려앉을 무렵이면 이 모든 종이들이 스러져가는 빛을 모아 반사했다. 들판에 내린 눈이 잉크빛의 밤하늘을 반사하는 광경과 흡사했다. 결국 사무실의 한가운데쯤으로 밀려난 쏘파가 재닌의 마지막 작업공간으로 남았는데, 항상 문이 열려 있던 그녀의 사무실을 지나칠 때면 필기용 깔개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허리를 숙인 채 무언가를 써내려가거나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깊은 생각에 빠진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나는 종이 사이에 파묻힌 그녀의 모습이 뒤러의 그림 「멜랑꼴리아 1」에서 파괴의 도구들 사이에 붙박인 듯 앉아 있는 천사를 연상시킨다고 그녀에게 가끔 말하곤 했는데, 이에 그녀는 얼핏 보기에는 자신의 물건들이 아무렇게나 어지럽게 놓인 것 같겠지만 실은 완성된, 혹은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질서를 갖고 있다고 했다. 실제로 그녀는 종이나 책, 혹은 그녀의 머릿속에서 무언가를 찾고자 할 때면 대개 재빨리 찾아낼 수 있었다. 내가 병원에서 퇴원한 직후 토머스 브라운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을 때............... (16~17)
그 문서더미는 '슬픔'이 아니겠습니까?
그 문서더미는 그 문서더미를 만든 사람의 삶이니까요.
삶은 슬픔에 지나지 않는 것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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