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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책 보기의 즐거움

오르한 파묵 《다른 색들》Ⅲ 여기와 다른 곳

by 답설재 2020. 6. 23.

오르한 파묵 《다른 색들》

이난아 옮김, 민음사 2018

 

 

 

 

 

 

 

 

춘천이나 강릉에서 살아보고 싶었습니다. 전주나 여수도 좋고 통영, 진주도 좋겠다 싶었습니다. 이유는, 막연합니다. 춘천, 강릉, 전주, 여수, 통영, 진주....... 우선 지명부터 좋은 곳들이지만 그런 곳들에 대한 그리움이나 이미지는 전혀 객관적이지 않아서 단 한 가지도 “이것!”이라고 내세우기는 어렵습니다.

 

오르한 파묵의 에세이에 빈번히 등장하는 주제는 이스탄불이 아닌 곳, 유럽 혹은 서양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이 무언가 ‘부족한 삶’일 것이라고 예감했었고, 이 예감의 일부분은 자신은 이스탄불, 그리고 터키의 모든 사람들과 함께 중심부 바깥, 변방에서 산다는 생각, 느낌과 관련이 있다고 했습니다.

문학에서의 근본적인 명제도 자신이 “중심부에 있지 않다”는 것이었고 세계의 중심부에는 자신들의 삶보다 풍부하고 매력적인 삶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 상이함 때문에 자신들에게 고통과 함께 희망을 주는 서양 문학이 있고, 글쓰기와 독서는 한 세계에서 빠져나와 다른 세계의 생소함과 신기하고 멋진 것들에서 위안을 찾는 일이었습니다.

그러한 인식과 정서는 한 인간으로서의 행복감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일생을 좌우하게 될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는 여러 색깔들로 이 감정들을, 거기서 파생된 결과들을 예민한 감정들을, 내적 갈등들을 오랜 세월 책상에 앉아 읽고 쓰면서 궁리하고 발견하고 심오하게 만들었으며 젊은 시절의 희미한 고통, 기분을 망치는 예민한 감정, 그리고 삶과 책에서 전염되는 혼란을 통해 많이 경험했다고 했습니다.

 

다음은 그가 1986년 뉴욕을 방문했을 때의 일을 적은 글의 한 부분입니다(510~511).

 

이렇게 몇 시간 동안 바라본 나의 눈은 보기 시작했다. 주유소 주유기에 있는 호스들과 눈금의 색들을 보았다. 모퉁이 신호등 앞 자동차들의 유리를 닦기 위해 거리로 뛰쳐나온 흑인들의 손에 들린 더러운 헝겊들을 보았다. 반바지를 입은 남자들의 운동화를, 공중전화 박스 속의 금속성 불빛으로 밝혀진 푸른빛이 도는 전화기를 보았다. 벽, 벽돌, 커다란 유리 조각, 소화용 호스, 바의 불빛, 횡단보도, 코카콜라와 말보로 광고, 벽보, 나무, 개, 노란 택시, 식품점……. 나는 마치 인내심을 가지고 반복되는 소화기 호스, 쓰레기통, 벽돌로 된 벽, 찌그러진 맥주 캔이 이 세상에 완성된 형태로 내려온 우아한 풍경을 보는 것 같았다. 거리, 마을, 우리가 앉아서 맥주를 마시는 식당도, 똑같은 행복한 꿈에 기꺼이 봉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

나중에는 이미지들과 빛으로 모습이 달라질 거리가, 상상에서 실제의 아스팔트 거리로 변하는 것을 느꼈다. 누구도 어떤 것이 살제 뉴욕인지 말할 수 없다.

(……)

 

오르한 파묵은, 오랜 여행 끝에 도착한 세계는, 마치 오랜 항해 후 안개가 서서히 걷히며 온갖 색깔들로 우리 앞에 천천히 나타나는 섬처럼 우리에게 경이로운 느낌을 선사하며 이는 서양 여행가들이 남쪽에서 배를 타고 다가와 아침 안개가 걷힐 때 이스탄불을 보고 받은 느낌과 비슷하다고 썼습니다.

이제 그의 세계는 터키라는 민족적인 세계와 서양 세계의 혼합이 된 것입니다.

나의 세계,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이곳에 춘천이나 강릉, 전주, 여수, 진주, 통영의 안개가 걷힌 모습이 스며들어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