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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믿었던 내 USB가 망가졌어요!"

by 답설재 2021. 4. 24.

 

 

 

이런 세상에!...... USB 단자(端子) 부분이 자라목이 되어 빠져나오질 않습니다.

이렇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USB라는 걸 믿었다기보다는 의심 같은 건 아예 염두에도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무작정 거리로 나갈 수도 없지 않습니까?

나가봤자 누가 쳐다보기나 하겠습니까?

"내 USB가 이 모양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죠?"('저 노인 미쳤나 봐')

그렇다면 어디 연락(신고)할 만한 데가 있습니까? 119나 경찰서는 아니겠지요? 정보통신부? 산업자원부? 소비자보호센터?......

아니죠? 나는 정말, 정말 심각하지만, 가슴이 쿵쾅거리고 머리가 지끈거리고 혈압이 올라서 쓰러질 지경이었지만 그런 기관들이 내 USB나 고쳐주려고 있는 건 아니겠지요.

 

송곳으로 틈새를 눌러보기도 하고 칼날로 틈새를 벌이면서 단자 부분을 빼려 해 보고 별 짓을 다하는 동안 별의별 생각도 했습니다.

디스켓이 처음 나왔을 때 전문가인 척하기 좋아하는 어느 동료가 그랬습니다.

"이 디스켓 한 장에 백과사전 몇 권이 들어가는지 아세요? 파란편지, 당신 따위는 지금까지 글이라고 쓴 모든 것이 이 한 장에 다 들어가고도 용량이 남아요!"

나는 납작해졌습니다.

그렇게 납작해져서도 "우와!" 혹은 "헉!" 하면서 주눅은 들지 않은 척 활기찬 동조를 했을 것입니다.

 

USB가 처음 나왔을 때 기억도 생생합니다.

어떤 사람인지 이 작은 물건에 몇 기가 바이트가 들어가는지 아느냐고 물었는데 그로부터 '정답'을 들었을 때도 나는 "우와!" 또는 "헉!" 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나는 지금도 바이트가 뭔지 기가가 뭔지 잘 모릅니다.

알아도 별 수 없고 그저 USB란 물건이 대단한 것이라는 믿음만 가지면 될 것 같았습니다.

다른 이는 어떤지 모르지만 나는 새로 나온 것(그러니까 '신식(新式)', 모르는 것(너무나 전문적인 것, 과학적인 것)에 대해서는 일단 맹신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컴퓨터와 관련된 것들이 대표적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헉헉거리며 겨우 겨우 여기까지 따라왔습니다. 그 세월이 긴 만큼 아득히 먼 거리를 허덕이며 살아온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그 단자는 꼼짝도 하지 않았고 송곳과 칼 등으로 자꾸 건드려서 마침내 아무래도 망가진 것 같다는 짐작을 하게 되었고, 그것에 내장된 내 정보는 서글프게도 나의 송곳질과 칼질에 의해 망가진 게 분명했습니다.

그때쯤 나는 원망의 대상을 포착했습니다.

그 USB를 판촉용으로 나누어준 M사 대표입니다.

분노의 전화를 할까? 사라진 내 정보에 대한 손해배상을 요구할까? 실현이 어려울, 가능하다 해도 '산 넘고 물 건너'가 될 일에 대한 공상도 해보았습니다.

 

그러던 중에 생각해낸 것이 움베르트 에코와 장클로드 카리에르의 대담록인 "책의 우주"(열린책들, 2011)라는 책입니다.

정보 저장 매체 문제를 이야기한 부분은 '영구적인 저장 매체? 그것만큼 일시적인 것도 없다'!라는 주제였습니다.

'문화가 어쩌면 더 효율적일지도 모르는 다른 도구들을 선택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 이 시대에, 우리는 책의 영속성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지만 디스켓, 카세트테이프, 시디롬 같은 매체들, 즉 정보와 개인적 기억들을 영구적으로 저장한다고 여겨지는, 하지만 우리가 벌써 등을 돌려 버린 매체들에 대해서는 과연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사회자)를 묻자 카리에르와 에코는 다양하고 구체적인 예를 들면서 많은 얘기를 했지만 USB에 대해 복수를 하고 싶은 내 심정을 충분히 대변해 줄 만한 두 부분만 옮기겠습니다.

 

카리에르 "(......) 이제는 친숙해진 우리의 DVD들 역시 잊힐 운명이 된 거죠. 그것들을 돌려볼 수 있는 옛날 기기들을 함께 보존하지 않는 한 말이죠. / 테크놀로지가 금방금방 구닥다리로 만들어 버리는 것들을 수집하는 것, 이것은 우리 시대의 특징적 경향 중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내 친구 중에 벨기에 영화인이 있는데, 이 사람은 자기 집 지하실 창고에 컴퓨터를 열여덟 대나 보관하고 있답니다. 왜냐고요? 간단히 말해서, 예전에 한 작업들을 보기 위해서예요. 이 모든 사실들을 볼 때, 이른바 반영구적 저장 매체만큼 덧없는 것은 없다고 말할 수 있어요. 요즘의 저장 매체들은 정말로 불안정하다는 것, 이건 지금 누구나 하고 있는 말이에요. 이런 말을 들을 때면 당신이나 나 같은 인큐내블러(말하자면 책 : 파란편지의 주) 애호가들은 슬그머니 미소를 짓지요. (......)"

 

에코 "(......) 현대의 매체들은 빠른 속도로 쓸모없는 물건이 되어 버리죠. 이런 물건들은 금방 읽을 수 없는 것, 짐만 되는 잡동사니가 될 수 있는데, 왜 그런 위험을 감수해야 하죠? 현대의 문화 산업이 지난 몇 년 동안 시장에 쏟아 낸 모든 물건들보다  책이 우월하다는 사실은 과학적으로 검증되었습니다. 따라서 만일 내가 쉽게 운반할 수 있고, 시간의 파괴 작용에 대한 저항력을 증명한 무언가를 선택해야만 한다면, 난 책을 선택하겠습니다."

 

카리에르와 에코의 이 대담을 찾아 읽고 나는 내 옹졸한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M사 대표님, 미안합니다~'

아~ 나는 바보처럼 곧 구닥다리가 될 허접한 정보 저장 매체를 철석같이 믿었구나...........

얼른 대안을 마련하고 싶었습니다.

 

제1안 USB를 쓰지 말자! 쓰레기통에 던져버리자!

 

제2안 "USB-무비유환(無備有患)"이었으니까 또 하나의 허접할 매체가 등장할 때까지 쓰긴 쓰되 유비무환(有備無患)의 정신으로 가능한 한 거기에 정보를 저장하지 말고 없어져도 좋을, 차라리 없어져야 할 정보나 넣어두고("이거나 먹어!"), 쓸 만한 정보를 넣으려면 또 하나의 바보 같은 다른 매체에도 저장해 두자! 둘 중 한 가지에만 남아 있어도 다행으로 여기는 넉넉한 마음을 가지자! 어느 날 디스켓처럼 PC 같은 것에도 그 따위를 꽂을 수 있는 장치가 사라질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되어도 언제 그랬는가 싶도록 살아가자, 응? 알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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