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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든 책

내가 그린 교과서 지도

by 답설재 2022. 4. 13.

요즘은 지도를 컴퓨터로 그리는데 하기야 컴퓨터가 동원되지 않는 일이 거의 없는 것이니까 당연한지도 모르겠습니다.

대학원 석사 과정에서 지도학을 강의한 김우관 교수가 그 지도 그리는 여러 가지 방법을 이야기해주었고, 저는 그분이 한번 그려보라고 하면 정말로 그려보곤 했습니다.

한번은 1mm 모눈으로 된 전지에 우리나라 지형도를 그려서 제출했더니 "이걸 정말로 그렸네요! 여름방학 내내 그렸습니까?" 하고는 기념품으로 달라고 해서 그러라고 한 적도 있었습니다.

 

 

 

 

 

1980년대까지는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어른들이 보는 위와 같은 지도가 실렸습니다. 내가 보기에 '이 아이들이 이렇게 복잡한 지도로 뭘 어떻게 배우겠나 싶었는데, 제6차 교육과정 때, 사회과 김용만 편수관께서 내게 3~6학년 사회과 교과서 수정과 보조 교과서 '사회과 탐구' 개발 실무를 거의 맡기다시피 했을 때 아무래도 어설프긴 하지만 아래와 같은 지도를 그려서 교과서에 실었습니다.

 

 

 

전문가들이 보면 당연히 단조로운 지도지만 트레싱페이퍼에 로터링펜으로 그린 지도입니다. 색깔별로 각각 다른 트레싱페이퍼에 선을 그리는 방법인데 그때 그렇게 그려서 교과서에 실은 지도 중에는 트레싱페이퍼 13매를 겹쳐 그린 지도도 있었으니 지금 생각해도 나의 그 집념은 정말이지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제도기도 없고 로터링펜과 대자, 각도기 같은 것밖에 구비하지 못한 채 방바닥에 종이를 펴놓고 그렇게 꼼꼼한 작업을 어떻게 하고 있었는가 하면, 술을 마셨습니다.

맨 정신으로는 그렇게 엎드려서 선을 그을 수가 없어서 술을 마셔서 약간 취한 상태라야 참고 견딜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 지도는 일본인의 그림지도를 보고 셈이 나서 그림을 잘 그린다고 소문이 난 서울 압구정초등학교(?) 강태현 선생님께 부탁해서 그렸습니다.

그분은 마음씨가 참 좋은 선생님이었고 설명을 긍정적, 수용적으로 들어주었습니다.

그렇게 교과서를 위해, 사회과 교육을 위해 헌신해주었는데 나는 그에게 도움을 줄 만한 입장이 아니어서 지금 생각해도 애석한 일이었습니다.

어제는 이 생각을 하다가 그분의 노후가 안락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자고 생각했습니다.

 

 

 

 

당시에는 국정 교과서를 인쇄·발행하는 국정교과서주식회사가 따로 있었습니다. 노량진에 있는 그 회사를 나는 시도 때도 없이 찾아갔습니다.

위의 지도를 그린 트레싱페이퍼를 당시 사회과 인쇄를 맡은 송주순 선생에게 주었더니 '초등학교 교사가 지도를 그렸다고?' 하는 표정이었는데 색 분해를 해보고는 감탄하면서 그때부터 나를 존중해주었습니다.

물론 김용만 편수관께서 전적으로 나를 신뢰한 것이 그에게 그런 마음을 가지게 한 것이기는 하였습니다.

 

 

아래 지도는 '식은 죽 먹기'였습니다.

한 장의 트레싱 페이퍼에 윤곽을 그려서 여기는 노랑 몇 %와 빨강 몇 %를 섞고, 여기는 파랑 몇 %라고 색 지정만 해주면 그만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삼십 년도 더 지난 옛일인데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한번은 적어놓고 싶었습니다.

그때 그린 지도를 다 찾아 스캔해서 여기에 실어놓을까 하다가 귀찮기도 하고, 그걸 뭐 하려고 싶어서 이 정도만 실어놓기로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