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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교육과정·교과서

교과서는 신이 아니다?(한국교육신문 2012.10.1)

by 답설재 2012. 10. 10.

 

교과서는 신이 아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인가, 싶지 않습니까?

 

신문에 그렇게 실린 걸 봤다는 전화를 받고, 저도 처음에는 당황했고, '그게 어떤 뜻을 이야기하는 걸까?' 생각했습니다. 누가 질문을 할 것 같진 않지만, 우선 필자인 저부터 그 제목의 속뜻을 정립(定立)해 놓아야 할 것 같았습니다.

누가 질문을 할 것 같진 않다고 한 것에는 대충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사람들은 보기보다는 매우 분주하게 생활하고 있습니다. '이게 뭐지?' 싶은 게 있어도 금방 다른 일 때문에 잊고 넘어가기가 쉽습니다. 하기야 대수롭지 않은 일이 대부분일 수도 있긴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때도 있는데도 그렇습니다. 한번은 제가 사는 곳에서 무슨 커다른 폭탄이 터진 것 같은 소리가 들렸는데, 그걸 문제삼는 사람을 단 한 명도 보지 못했고, 내 귀를 의심하고 말았는데 얼마 후에 신문의 지방면에서 그 이유가 기사화된 걸 본 적도 있습니다.

 

다음으로, 조금 예민한 사람은 '본문을 읽어보면 그 답이, 혹은 설명이 나오겠지. 교과서가 신이 아닌 이유를 알 수 있게 되겠지.'하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건 매우 정당한 생각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대부분 실제로 읽지는 않고 눈길을 다른 데로 돌리게 되며, 설사 이 글을 읽어도 그 답을 알아내기는 어렵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럴 때 독자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 거의 확실합니다.

'그것 참, 읽어봐도 교과서가 신이 아닌 이유는 잘 모르겠는데? 내가 마음이 복잡하고 분주해서 정독(精讀)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겠지'

정독을 하지 않았다 해도 그 뜻을 얼른 알 수 없게 한 잘못은 필자나 신문사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문에 실리는 글은, 매우 평이한 문장으로 써야 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신문은 어느 특정 수준의 사람들만 읽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번 째로 생각나는 이유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이 글을 읽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점입니다.

이 신문을 1,000명이 받았을 경우 이 글을 읽은 사람은 결국 겨우 한 명 정도(0.1%)일 것으로 단정합니다. 그러므로 까짓거 '교과서는 신이 아니다!'라고 해봤자 별 수 없는 제목일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마지막으로, 교과서라는 것은 사람들에게 그리 매력적인 소재가 아니어서 눈길을 끌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교과서로써 공부를 할 때에야 그건 심각한 생활도구가 되지만, 일단 학교를 졸업하고나면 그만이고 꼴도 보기 싫은 존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학생들도 교과서에 관한 기사가 신문에 났다면, 더구나 교과서 내용 중 뭐가 틀렸다는 것도 아니고 '교과서는 신이 아니다!"라는 글이 실렸다면 "그렇고 말고! 교과서가 신이라면 그럼 우리가 신을 믿어야 할 이유가 없어질 것이 분명해!"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말할 것도 없는 일입니다. 신문에 교과서 관련 기사가 났다면 "아유, 지겨워!" 하고 외면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럼, 필자 자신이 쓴 글을 두고 왜 그 제목에 대해 의아해하는가?

이 제목은 내가 붙인 제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문사에서 기자가 마음대로 붙인 제목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항의를 해야 할 것 아닌가?" 할 수도 있지만, 그 제목을 붙인 이유를 좀 생각하다가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고 말았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대충 두 가지 이유가 생각났습니다. 우선 제목이라도 그렇게 붙여야 0.1%라도 읽을 것이라는 예측이고, 다음으로는 정말로 교과서는 신이 아니기도 하다는 점입니다. 그건 어떤 뜻이냐 하면, 교과서에 적힌 것이라고 해서 모두 맞는 것은 아닐 수 있다는 뜻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본 것입니다. 교과서에 적힌 것이라고 해서 모두 진실일 리가 없고, 더구나 그 중에는 단순한 오류가 많다는 것이 문제가 되기도 하는데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교과서에 적힌 것은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여기고, 교과서는 성전(聖典)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는 점입니다.

 

이 글이 실린 것은 9일 전인 10월 1일이었고, 읽어봤다는 사람의 전화 한 통을 받았고, 만난 사람 중에 또 한 명이 읽어봤다고 했습니다.

 

 

 

 

아래 글은 이 글의 원문입니다.

 

그러고보면 제가 붙인 제목 "교과서 정책, 문제해결 관점 정립이 중요한 이유"는, 교육과학기술부에서 교과서 행정을 담당하는 공무원 혹은 교육연구소 같은 곳에서 교과서 정책을 연구하는 사람에게나 눈에 띌 제목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이 글의 제목은 "교과서는 신이 아니다!"도 부적절하고, 더구나 "교과서 정책, 문제해결 관점 정립이 중요한 이유"도 부적절한 것이 분명합니다.

 

나는 결국 제가 쓴 글의 제목하나 바르게 정하지 못하고만 것입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이렇게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이처럼 자리에 앉으면 세상을 잊고 마구 써내려가고 있으니…… 이 세상에는 오늘도 얼마든지 무책임한 정보가 마구 쏟아지고 있으니…………

 

 

교과서 정책, 문제해결 관점 정립이 중요한 이유

 

 

세상에 우리나라만큼 교과서의 권위를 중시하는 나라가 또 있을까. 오래 전부터 “학습자료의 일종” “교육과정 운영에 필요한 주 자료”라는 것을 강조해왔지만, 교원들까지도 돌아서면 ‘금과옥조(金科玉條)’로 구성된 성전(聖典)으로 여긴다. 그것을 원망할 수도 없다. 수능고사 문제가 교과서 밖에서 출제되면 너나없이 큰일 난 것으로 떠들지만, 교육과정을 문제 삼는 사람은 전혀 없다.

 

2000년대에 들어 ‘한국근현대사’ ‘경제’ 교과서의 이념문제가 불거진 것은, 극명하게 다른 관점이 직접적 원인이었지만, 이와 같은 전통적 교과서관(敎科書觀)에 대한 반작용이 정부의 검정교과서 확대 정책에 편승하여 비판의 강제적 금기(禁忌)가 해제된 듯한 분위기도 한 몫 한 것 아닌가 싶다.

또 다양한 견해와 주장의 분출은 ‘흥부와 놀부’ ‘의좋은 형제’ 같은 이야기는 당연히 게재돼야 한다는 관점이 사실상 무너지게 된 사회현상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는 느낌도 있다.

 

최근에는 교과서에 작품이나 일화 등이 실린 시인, 학자가 정치가로 등장함으로써 논의가 더욱 심층적·구체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교육내용은 교육 본래의 목적에 따라 그 기능을 다하고, 정치적·파당적·개인적 편견을 전파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용되지 않아야 한다” 혹은 “교육내용은 특정 정당, 종교, 인물, 인종, 상품, 기관 등을 선전하거나 비방해서는 안 된다”는 교육의 중립성을 어떻게 해석하고 적용하느냐에 관한 고심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과학기술부의 정책은 발전적·급진적이다. ‘2010 교과서 선진화 방안’을 보면, 장차 시중의 일반도서도 인정절차만 거치면 교과서로 사용할 수 있다고 했다. 또 학회나 공공기관도 검정교과서를 출원할 수 있게 했고, 폐쇄형 합숙심사를 개방형 심사체제로 전환했다. 뿐만 아니다. 국정·검정이었던 교과서를 대폭 인정도서로 전환하여 7차 교육과정기에는 겨우 13%였던 인정도서가 이제는 84%로 확대되어 교과서 개발과 심사가 시·도교육청의 주요업무가 되었다.

 

더 심각한 과제도 있다. 스마트(SMART)교육 추진계획에 따르면 2015년부터 디지털 교과서가 상용화된다. 어느 행정가는 최근의 교과서 정책들을 종합해보고 곳곳이 지뢰밭이라고 표현했을 정도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 변화가 결코 부정적이거나 비관적인 것은 아니다. 문제점으로 지적된 것이 변화에 따른 불가피한 면인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가령 “무턱대고 성급하게 인정화한 교과서들은 국정·검정으로 되돌려야 한다”는 비판은, 시대적 요청과 변화의 동향을 외면한 비난으로, 가능한 제안도 아니고, 그럴 필요도 없다.

인정도서에 대해서는 앞으로 정부의 관여를 최소한으로 줄이고, 현장교원과 출판사들이 전문성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면 기대 이상의 성과가 드러날 것이다.

 

국가 정체성 혹은 이념에 관한 논란의 소지가 있는 국어, 도덕, 사회, 국사 교과서 검정이나 교육의 중립성 확보는, 심사 과정의 전면 공개로써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국가 정체성과 교육의 중립성 확보를 위한 논의 자체를 공개함으로써 그 필요성과 실천방안에 대한 국가·사회적 공감대부터 형성해야 한다.

그러한 논의에서 교과서 검정심사를 보다 엄격하게 해야 한다는 당위성이 정립된다. 일껏 심사해 놓은 교과서를 두고 법원의 판단을 요청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게 된다.

 

디지털 교과서 도입도 그렇다. 내용중심이냐 도구중심이냐의 논란은 어처구니가 없다. 디지털 교과서를 종이책 대하듯 누구나 만만하게 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관점이 필요하다. 생소하거나 거치적거리면 그건 교과서가 아니고, 교육이 잘 이루어질 리가 없다.

 

새로운 정책의 구현에는 현장(학교, 출판시장 등)의 이해가 필수적이다. 터무니없다 하더라도 분출하는 비난을 방치하거나 임기응변으로 대응하면 좋은 정책도 왜곡될 것은 당연하다.

 

서두르지 말고 본질적 해결방안을 찾아야 하며, 변화와 발전의 방향 인식을 위한 연수가 선행돼야 한다. 가령 초등 교사들은 국정 교과서에 익숙해서 검인정을 잘 모른다. 교육선진국 교사들은 거의 자율채택제(자유발행제)에 익숙하다는 것도 모른다. 이러한 현상이 “무슨 정책이 이런가?” 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중고교 교사들이나 출판사 대표들도 대부분 크게 다르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