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학생들을 슬프게 하는 것
선생님, 보셨어요? (신문만 보느냐고 하실까봐 걱정이지만요.) 미국 명문 사립고 필립스 엑시터(Phillips Exeter) 토머스 하산 교장 인터뷰 기사 말이에요. “수학은 다양한 방법으로 문제를 풀어봐야 하는데, 교과서가 있으면 틀에 얽매일 수 있다. 교과서를 없앴더니 수능(SAT) 성적이 도리어 올랐다.”
학생들이 문제를 이해하기보다 공식을 암기하려고만 해서 20여 년 전에 아예 교과서를 없앴다니 사실은 옛날 얘기에요. 수업은 늘 원탁에 둘러앉아 토론하는 것이고, 선생님은 방향만 유도할 뿐이래요. 주입식보다 나은 수업을 연구하다 모든 교과목 수업을 아예 토론식으로 다 바꾸었대요.
우리나라에서도 토론수업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는 학원 얘기가 신문에 나기도 하고, 어느 대안학교와 자사고에서 그런 멋진 수업을 하고 있는 걸 요전에 EBS TV(‘학교란 무엇인가’)에서 본 적이 있어요. 부러웠어요.
안병영 전 교육부장관의 표현(2004)을 빌리면 “소년원에서 출소하여 보호 감호를 받고 있던 아이들, 학교에서 쫓겨난 아이들, 가출하여 거리를 배회하던 아이들, 귀고리에 노랑머리 아이들, 제도권 교육에서는 도저히 포용할 수 없는 아이들, 사회에서 버림받은 아이들” … 그런 부적응아, 문제아, ‘찌질이’들의 학교로 출발한 대안학교가 감동·감탄의 대상이 되고 있으니 신기하다고 해야 할지, 희한한 일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교육학자나 교육행정가, 선생님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요.
“야, 인마! 필립스 엑시터는 한 반 학생이 12명이라잖아!” 그러시겠어요? 우리나라에도 그런 학교는 얼마든지 있지만 역시 주입식, 문제풀이 공부를 시킨다잖아요. 역설적이라 송구스럽지만 아마 우리나라는 한 반에 대여섯 명 앉혀 놓고도 선생님은 열정적으로 설명하고 아이들은 경청하는 수업을 할 것 같지 않아요?
그런데도 오바마는 줄기차게 우리나라 교육을 칭찬해대니 알다가도 모를 대통령이에요. 하긴 그 대통령만 우리 교육을 칭찬하고 있지만, 지난 2일에도 새로 뽑힌 주지사들 앞에서 한국교육의 경쟁력을 높이 평가하면서 미국 아이들은 베이징, 벵갈루루, 서울 아이들과 경쟁하고 있다는 걸 상기시켰대요.
솔직하게 말하면 우리의 PISA 성적은 세계 최고 수준이라 하더라도 이런 수업이 지긋지긋한 건 사실이에요. 조기유학 간 아이들이 지적한 한국교육의 나쁜 점은, 암기위주 주입식 교육(21.4%), 과중한 공부(20.5%), 자질 무시(19.6%)였다는 한국교육개발원 조사발표도 있었잖아요.
이런 비판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닌데도 우리나라 교육행정은 이 문제에는 별 관심이 없는 것 같아요. 주입식 교육을 탈피하자는 목소리를 듣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잖아요.
‘논술 안 보는 대학에 돈 더 준다’는 발표가 있었죠? 교육과학기술부에서는 논술이 사교육을 유발하기 때문에 대입전형에서 아예 없애버리거나 비중을 줄이는 대학에 인센티브를 주겠다고 하고, 대학들은 자율성을 침해한다고 비판했다는데, 어느 것도 우리 학생들 입장은 아니에요.
2,3년 전만 해도 학교에서 논술을 잘 가르치겠다면서 미국의 자기소개서(Application Essay), 프랑스의 바칼로레아(baccalaureat) 얘기도 했었잖아요. 논술은 배운 내용을 종합하고 자신의 사고력, 창의력을 총동원할 수 있는 멋진 공부 아닌가요? 우리에게 그런 능력을 지금 길러주지 않으면 우리가 어떻게 장차 다른 나라 학생들과 겨룰 수 있을까요?
다양한 방법은커녕 공식만 달달 외워서 풀고 논술 공부 같은 건 안 한다 해도 우리에겐 잠잘 시간, 놀 시간이 늘 부족해요. ‘하루 5시간 자는 고3’ ‘서울 고3 절반은 체육수업 안 한다’는 기사도 봤어요. 도대체 무얼 하자는 걸까요? 체육도 체육이지만 차라리 학생도 최소한 얼마만큼은 자고 놀아야 한다는 ‘시간배당기준’이라도 생겼으면 좋겠어요.
지금은 교과서, EBS 교재에 파묻혀 살고 대학 가서 실컷 놀면 되는가요? 그렇게 해서 어떻게 선생님 말씀처럼 우리가 세계무대에 당당히 서고 세계의 흐름을 주도할 수 있을까요? 저는 그럴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요. 그게 슬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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