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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교육논단

교육의 큰 그림도 필요하다

by 답설재 2008. 4. 12.

 

 

  이 글은 <경기신문> 2008년 4월 1일자 시론의 원고를 일부 수정하고 부분적으로는 더 구체화한 것으로, 한국교과서연구재단에서 발행하는 저널 <교과서연구> 제53호(2008. 4)의 권두언입니다. 저는 2005년부터 이 저널의 편집기획위원장을 맡아보고 있습니다.

 

  이명박 정부에서는 정부기구를 개편하면서 초중등교육업무를 지방정부로 이양하겠다고 했으나 국가 교육과정 업무와 교원업무는 종전보다 축소하여 남기는 것으로 파악됩니다. 저는 교육강국 핀란드 의회에 '미래위원회'가 있어 교육의 비전을 제시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부럽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 정부에도 대통령 직속으로 '미래기획위원회'를 둔다는 기사를 읽은 것으로 기억되는데, 이 기구에서는 현실의 질곡에 빠져 자질구레한 일이나 하다가 세월을 보내지 말고 우리 교육의 비전도 제시해나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비전은 우리가 하는 일이 더욱 튼튼하게 하고 시행착오를 줄여주기 때문에 중요할 것입니다.

 

  <교과서연구>는 한국교과서연구재단이 워낙 가난하여 1년에 단 세 권만 나오는 저널이며, 비매품으로 전국의 교육기관과 각급 학교에 1권 정도씩 배부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새 정부의 출범에 즈음하여 이 내용을 강조하고 싶어서 제 글을 권두언으로 싣게 되었습니다. <경기신문>은 독자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이긴 하지만 이 신문의 시론에 실은 원고를 수정하여 다시 소개하게 된 것을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교육의 큰그림도 필요하다

 

 

  어느 날, 교과서가 없어지면 학교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아, 그거야 뭐, 아무 상관없습니다. 교육과정 기준을 보고 가르치고 배우면 되니까요.” 그런 대답을 하는 교사들이라면 우리는 걱정이 없다.

  인공지능학자 로저 샨크(2002)는 50년쯤 후에는 현재의 우리가 교과서를 사용하고, 수능시험을 치르고, 기억력을 학력의 주요요소로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이 거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라고 하면서 이렇게 썼다. “지난 세기와 그 이전의 수많은 세기 동안, 교육을 받는다는 것, 따라서 지성을 갖춘다는 것은 사실의 축적,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인용하는 능력, 어떤 관념에 익숙해지는 것을 의미했다. (중략) 하지만 그 사실들이 (컴퓨터에 의해) 벽에 씌어져 있다면 어떻게 될까?”

 

  학자들은 이미 1970년대부터 교과서의 내용이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취급되는 현실을 비판하고, 교과서는 다만 ‘여러 가지 학습자료 중 중심적인 자료의 하나’ ‘교육과정의 목표와 내용을 실현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일 뿐이므로 ‘선택되는 자료, 창의적인 인간, 교육과정 자료, 다양성, 자율의 특성을 가진 열린 교과서관’이 필요하며 ‘전달과 기억을 중심으로 지식을 습득하기보다 지식과 기술을 조직․평가․선택․활용하고 생산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교과서’ ‘자기주도적 학습능력을 함양하는 교과서, 교과통합적 학습경험을 촉진하는 교과서, 학습자의 경험세계와 연계를 지니는 교과서, 학습자의 인지 구조 및 수준의 차이를 고려한 교과서’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아직은 요원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물리Ⅱ 과목의 정답시비문제가 일어났던 2008 수능시험에서 “고등학교 과정에서는 단원자분자 이상기체만을 가정한다.”면서 심지어 “수능은 우수 학생을 선발하는 본고사가 아니라 60만 가까운 학생이 보는 보편적 시험”이라는 어처구니없는 견해까지 내놓았던 한국교육과정평가원(한국 교육과정 연구의 메카!)의 담당자가, 실제로는 여러 교과서에서 다원자 이상기체도 다루고 있다는 것이 확인되자 결국 복수정답을 인정한 사실이 명백한 사례가 된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교과서가 ‘경전(經典)’이므로 교과서를 잘 읽고 외울 수밖에 없는 -어떤 것이 우리가 기대하는 ‘학력(學力)’인지 명확한 개념설정도 하지 않은 채 무턱대고 외우게 하는- 한심한 교육에 매몰되어 있다는 것을 시인한 것이다.

 

  일본은 다르다. 2007년 8월에 예고된 차기 ‘학습지도요령’(교육과정)은, 학력을 높이지 않으면 “21세기의 일본은 위험하다”는 것을 전제로 한 ‘확실한 학력(確かな學力)’ 정책이 그 기본이다. 또 지식․기능과 사고력․판단력․표현력이 ‘살아가는 힘’(지식)의 주요 예시라는 것을 분명히 했다.

  일본의 교육기반이 튼튼한 것은, 새 학습지도요령이 혹독한 비판을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이미 2001년에 시작된 교육개혁의 일환으로 이루어지는 부분개정이라는 점, 우리가 서둘러 교육과정을 바꾸고 전 교과서를 전면 개편하는데 비해 저들은 4년 주기로 교과서 정기검정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는 점에서도 찾을 수 있다.

 

  우리는 교과서 내용은 ‘숭상(崇尙)’하면서도 교육과정․교과서 행정 기이할 정도로 후진을 면치 못한 나라이기도 하다. 일본은 교육과정 개정에 앞서 ‘의무교육비분담법’을 개정하고 국제학력조사 결과를 철저히 반영하며 교원양성 등 광범위한 관련 분야부터 정비하는데 비해 우리는 그러한 분야가 오히려 교육과정․교과서 행정보다 중시되고 있으며, 걸핏하면 관련 행정조직을 흔들고 있는 나라이다.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을 내세우면서도 교과서 한 권 값은 “담배 한 갑보다 싸다”는 것이 자조적(自嘲的) 표현임을 인식하지 못하고 교과서 발행사를 입찰로 결정하게 된 나라이기도 하다.

 

  우리는 또 국가에서 관리․지원하는 ‘교과서박물관’ 하나 가지고 있지 않을 정도로 교과서 연구에도 소홀하다. 1992년에 설립된 한국교과서연구재단은 교과서 조사연구, 연구물의 출판, 정부와 교과서 발행사들의 위탁연구 수행은 물론 교과서 전시관 운영이 기본사업이다. 그러나 우선 자력기반을 조성함으로써 장차 연구사업의 활성화, 교과서박물관 설치․운영, 교과서 연구조직과 재단 청사 확보, 교육지원기관과의 협력체제 구축 등 획기적인 사업을 전개하겠다는 5개년계획(1997.10.장관결재)을 세워 발표한 바 있으나, 아직까지 기금조성 등 초기의 목표조차 달성하지 못한 채 단 4명의 직원이 최소한의 사업만 수행하며 사무실을 지키는 빈한한 상태에 머물고 있으며, 전시관 운영을 위한 자료도 거의 사무국의 열성만으로 수집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명박 정부의 교육개혁방향은 대학의 학생선발 3단계 자율화, 영어 공교육 강화, 초․중등교육 분권화로 밝혀지고 있으며, 이러한 정책은 우리 교육의 고질적인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의욕적인 과제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우리는 앞으로 우리의 인적자원이 세계의 흐름을 주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교육개혁의 지향점, ‘교육의 큰 그림’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 ‘그림’은 당연히 교육과정․교과서 정책에서 나와야 한다. 그리고 그 방향은 당연히 오늘날 세계 어느 곳에서나 국가적 관심사가 되고 있는 ‘창의적인 인재육성’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 정책은 또한 전 세계 주요국의 교육과정․교과서 정책방향을 파악하고, 그들은 교육과정․교과서 행정을 어떠한 비중으로 수행하고 있으며 다른 교육행정과 어떠한 관련 속에 추진하고 있는가를 분명히 파악함으로써 제대로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이 강조되어야 한다. 새 정부에서 초․중등교육 전 업무를 지방에 이양하되 국가 교육과정의 기본 틀과 교원업무는 중앙정부가 맡게 된 것을 주목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