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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2

"노래는 거기 그대로 있는데…" "오르페우스는 에우리디케를 다시 잃은 후에 더 이상 여자를 사랑할 수 없어서……."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신형철)이라는 책에서 이 문장을 읽는데(73 L5) 돌연 내 또래의 어느 가수가 떠올랐다. "주제넘다"고 할지 모른다.("너는 뭐 외롭지 않은 인간인 줄 아니?") 그는 TV에 출연해 이야기하는 내내 외롭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내가 보기에 그는 '외로움' '슬픔'으로 이루어진 사람 같았다. '그런 사람이었구나!' 생각하며 인터넷에서도 살펴보았다. 거의 방송에서 본 내용들이었다. 그렇다면 이전에는 그의 생활이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는 얘기가 된다. 통기타를 치며 노래하던 시절, 그는 애절한 노래의 진수를 보여주었지만 지금은 기타만 가지고 누군가가 제공해 준 조그마한 공간에서 지낸다. 자유로운.. 2019. 6. 15.
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신형철 산문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한겨레출판 2018 1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아이스킬로스의 소위 '고통을 통한 배움(pathei mathos)'(〈아가멤논〉, 177행)이란 고통 뒤에는 꺠달음이 있다는 뜻이지만 고통 없이는 무엇도 진정으로 배울 수 없다는 뜻도 된다. 타인의 슬픔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같은 경험과 같은 고통만이 같은 슬픔에 이를 수 있다는 것 말이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비참한 소식이다. 그런데 더 비참한 소식은 우리가 그런 교육을 통해서도 끝내 배움에 실패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 교육이 하나의 생명으로서의 내 존립을 위협하기라도 한다면 말이다. 아가멤논과 스티븐과 우리 사이에는 단 하나의 결정적인 공통점이 있어 다른 많은 차이점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자.. 2019. 3.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