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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박연준2

박연준 「파주, 눈사람」 2019.2.15. 파주, 눈사람 박연준 여보, 방에 좀 가봐 방에 눈이 내려요 언제부터? 우리가 잠든 시간부터, 지난해부터, 지지난 봄부터, 당신은 성큼성큼 방으로 들어가 커튼을 친다 눈을 숨기려는 듯이 눈이 쌓이면서 발목이 사라지는 것을 본다 고요하고 하염없네? 고요하고 하염없지 눈 쌓인 책상을 지나 눈 덮인 겨울을 지나 눈빛이 꺼진 유령들, 허리를 지나 우리는 침실 스위치 옆에 나란히 서서 두 마리, 사랑에 빠진 눈사람 눈 코 입이 사라지는데 서로 속삭인다 녹지 마세요 녹지 마렴. 우리가 가고 나면 우리가 가고 나면? 죽은 우리 둘이 와서 나란히, 눈 속에 살겠네 ―――――――――――――――――――――――――――――――――――――――――― 박연준 1980년 서울 출생. 2004년 『중앙일보』 등단... 2019. 4. 6.
「아침을 닮은 아침」 아침을 닮은 아침 박연준 지하철 환승게이트로 몰려가는 인파에 섞여 눈먼 나귀처럼 걷다가 귀신을 보았다 저기 잠시 빗겨 서 있는 자 허공에 조용히 숨은 자 무릎이 해진 바지와 산발한 머리를 하고 어깨와 등과 다리를 잊고 마침내 얼굴마저 잊은 듯 표정 없이 서 있는 자 모두들 이쪽에서 저쪽으로 환승을 해보겠다고, 안간힘을 쓰는데 그는 소리를 빼앗긴 비처럼 비였던 비처럼 빗금으로 멈춰 서 있었다 오늘은 기다란 얼굴을 옆으로 기울이며 지금을 잊은 게 아닐까 우리의 걸음엔 부러진 발목과 진실이 빠져 있는 게 아닐까 한 마디쯤 멀리 선 귀신을 뒤로하고 개찰구를 통과하는 눈먼 귀신들 오늘 아침엔 아무도 서로를 못 본 채 모두가 귀신이 되어 사라졌다 ―――――――――――――――――――――――――――――― 박연준 198.. 2013. 9.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