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임 선생님3 "야, 이놈들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부터는 고달픈 삶이랄까, 그 이전이 보잘것없는 세월이었다면 이후는 고달픈 일들의 연속이었다. 그것도 어쩔 수 없어서 선택한 일들이어서 말하자면 나는 세월에 끌려다녔다. 그럭저럭 책은 좀 읽었다. 그건 국어를 가르쳐주신 고등학교 담임 선생님 덕분이었다. 굽이굽이에서 그분이 떠올랐다. 공교롭게도 중학교 담임도 국어 교사였는데 그는 취미란에 '독서'를 써넣은 나를 일으켜 세우고는 온갖 창피를 다 주었다. 독서는 취미가 아니고 필수라느니 이제 온 국민이 독서를 생활화해야 한다느니, 무엇보다도 독서를 밥 먹듯 해야 한다느니... 그는 우리나라 국민들이 독서에 힘쓰지 않고 돈 버는 일에만 매진하는 게 마치 중학교 1학년에 갓 입학한 내 잘못인양 한 시간 동안 나를 세워놓은 채 그렇게 지껄여대는 바.. 2023. 12. 13. 아이들은 결국 우리의 모든 것 1989년에 나는 초등학교 1학년 담임이었습니다. 교사생활로는 마지막 해였습니다. 그해 봄, 나는 1학년 아이들의 어머니들이 모인 강당에서 강연을 했는데 지금 여러분의 자녀들은 마치 군대에 간 것 같은 느낌일 것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 얘기는 나 스스로 잊지 않고 지냈습니다. 교육부에서 오래 근무하다가 이번에는 교직생활 마지막 몇 년 간 교장을 했습니다. 그때 나는 아이들은 결국 "우리의 모든 것"이라고 했습니다. 올해 초등학교 1학년이 된 아이들은 1학년이 된 지 거의 석 달 만에 학교에 가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게 정말 미안합니다. 코로나 19 바이러스를 뚫고 처음으로 등교하게 된 것이 걱정스럽기도 합니다. 부디 아무 일 없기를 마음을 모아 기원합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2020. 5. 22. 다시 온 봄 겨우내 눈밭에 뒹굴어도 괜찮을 만큼 '튼튼한' 점퍼 한 가지만 입고 지냈다. 문밖에만 나서면 '무조건' 그 옷을 입었고, 더구나 털모자까지 뒤집어썼다. 한심한 일이면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1969년 봄부터 딱 41년, 출근을 하는 날이면 '무조건' 정장을 하다가 그렇게 하자니 어색했지만, 그것도 며칠이지 곧 익숙해졌다. 이월에는 복장을 좀 바꿔 볼까 했다가 그만둔 건 신문기사 때문이었다. '봄이 왔다는 말을 믿었다가 뇌졸중으로 쓰러지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 '까짓 거'? 그렇게 가소롭게 여길 일은 아니었다. '핏줄에 스탠트라는 걸 집어넣었으니 이젠 괜찮겠지' 했는데 몇 달만에 다시 실려가 그걸 또 한 번 집어넣고 나니까 이건 예삿일이 아니었고, '내 핏줄은 걸핏하면 좁아질 수 있구나' 싶어 지레 .. 2011. 4. 2. 이전 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