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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달과 6펜스3

서머싯 몸이 이야기한 기이하고 환상적인 그림 「무엇을 그린 그림입니까?」 내가 물었다. 「글쎄요. 아무튼 기이하고 환상적이었어요. 이 세상이 처음 생겼을 때의 상상도랄까. 아담과 이브가 있는 에덴 동산 같은 거였어요. 뭐랄까, 인간의 형상, 그러니까 남녀 형상의 아름다움에 대한 찬미이기도 하고, 숭엄하고 초연하고 아름답고 잔인한 자연에 대한 예찬이기도 했어요. 그걸 보면 공간의 무한성과 시간의 영원성이 섬뜩하게 느껴졌습니다. 그 사람이 그린 나무들은 매일 주변에서 보는 야자수며 반얀이며 홍염화며 아보카도 나무열매 같은 것들이었는데, 그 때문에 그 그림을 보고 난 뒤로는 나무들이 영 달리 보이더군요. 마치 거기에 잡힐 듯 잡힐 듯하면서도 영원히 잡히지 않는, 무슨 영혼이나 신비가 숨어 있는 것처럼요. 색채깔들은 눈에 익은 색채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달.. 2020. 12. 10.
서머싯 몸이 설명한 과일 그림 베란다에서 진찰실로 통하는 문간에서 그는 잠시 발을 멈추고 빙긋이 웃었다. 「과일을 그린 정물화입니다. 의사에 진찰실에 별로 어울리지 않는 그림이라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집사람이 응접실에는 절대 걸어놓을 수 없다고 하지 뭡니까. 너무 외설스럽다나요.」 「정물화가 말입니까?」 나는 놀라서 소리쳤다. 방에 들어갔다. 금방 그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한참 동안 그림을 바라보았다. 망고, 바나나, 오렌지, 그 밖의 이름 모를 과일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는 그림이었다. 언뜻 보면 조금도 이상할 데가 없는 그림이었다. 무심한 사람이라면 후기 인상파의 전람회 같은 데서, 잘 그렸긴 하지만 이 유파를 대표할 만한 작품은 못 된다고 여기고 그냥 지나치고 말 그런 그림이었다. 하지만 나중에도 자꾸 그 그림이 기억에 떠올.. 2020. 12. 7.
서머싯 몸 《달과 6펜스》 서머싯 몸 《달과 6펜스》 송무 옮김, 민음사 2013(1판 54쇄) 「스트릭랜드를 사로잡은 열정은 미를 창조하려는 열정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마음이 한시도 평안하지 않았지요. 그 열정이 그 사람을 이리저리 휘몰고 다녔으니까요. 그게 그를 신령한 향수(鄕愁)에 사로잡힌 영원한 순례자로 만들었다고나 할까요. 그의 마음속에 들어선 마귀는 무자비했어요. 세상엔 진리를 얻으려는 욕망이 지나치게 강한 사람들이 있잖습니까. 그런 사람들은 진리를 갈구하는 나머지 자기가 선 세계의 기반마저 부숴버리려고 해요. 스트릭랜드가 그런 사람이었지요. 진리 대신 미를 추구했지만요. 그 친구에게는 한없는 동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어요.」(276~277) 증권 브로커 스트릭랜드는 돌연 가정을 '탈출'합니다. 전혀 내색하지 않고 지.. 2020. 11.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