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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남진우3

남진우 「헨젤과 그레텔」 헨젤과 그레텔 남진우 숲으로 가는 길엔 늘 과자 부스러기가 흩어져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면 사라지는 덤불들이 숲을 에워싸고 저 높이 야윈 달 뒤에서 간혹 여우가 얼굴을 내밀기도 했다. 다시는 못 올 길을 더듬어가면서 소년과 소녀는 과자 부스러기를 주워 먹었다. 멀리 숲 한가운데 붉고 노란 빵과 과자로 만들어진 집이 불을 밝히고 있었다. 밀가루와 설탕 크림과 캐러멜로 이루어진 둥근 오두막 한가운데 늙은 마녀는 물레를 돌리고 돌아가는 물레 따라 훈훈한 모카 시나몬 레몬 향이 사방으로 번져 나갔다. 숨죽이고 바라보던 소년과 소녀는 벽과 문 계단과 유리창 이윽고 찬장과 식탁 욕조와 침대까지 뜯어 먹기 시작했다. 마침내 달빛까지 사라진 숲의 빈터엔 덩그렇게 남아 물레를 돌리는 마녀 한 사람뿐. 소년과 소녀는 트림.. 2020. 10. 23.
남진우 「여우 이야기」 여우 이야기 남 진 우 어린 시절 내가 살던 집 뒤안 대숲 속에 여우 한 마리가 살고 있었다. 바람 소리도 그친 깊은 밤이면 바닥에 쌓인 수북한 댓이파리를 밟으며 살그머니 다가오는 여우의 발자국 소리가 들리곤 했다. 사각사각 여우가 달빛을 베어먹고 있다. 사각사각사각 여우가 처녀의 간을 베어 먹고 있다. 사각거리는 소리에 잠 깨어 창문을 열고 바라보면 멀리 어둑한 대숲 속을 거니는 여우 눈빛이 손에 잡힐 듯 반짝거리곤 했다. 사각사각사각 여우가 대숲을 빠져나가며 피 묻은 발자국을 찍고 있다. 사각사각사각 여우가 실개천을 건너며 물 위에 비친 처녀의 모습을 노려보고 있다. 저것은 여우가 지나갈 때마다 지붕 위의 기와들이 곤두서는 소리, 저것은 여우가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길고긴 복도의 마룻장이 삐걱이며 .. 2018. 8. 13.
남진우 「꽃구경 가다」 꽃구경 가다 남진우 봄날 피어나는 꽃 옆엔 으레 저승사자가 하나씩 붙어 있다 봄날 피어나는 꽃 옆에 다가가면 저승사자는 한쪽 눈을 찡긋하며 오라, 너도 꽃구경 온 게로구나 이 꽃 저 꽃보다 나랑 진짜 꽃구경하러 갈까 한다 저승사자 손에 이끌려 꽃밭 사이 무수한 꽃들 위에 엎으러지고 뒤집어지다가 하늘하늘 져 내리는 꽃잎을 이마로 받고 가슴으로 받고 팔다리로 받다가 아 이 한세상 꽃처럼 속절없이 살다 가는구나 싶어 고개를 들면 저승사자는 그윽히 나를 바라보고 있다 길가 꽃그늘에 앉아 잠시 숨 고르고 꽃들이 내뿜는 열기 식히노라면 저무는 하늘에 이제 마악 별이 돋아나고 내가 가야 할 길 끝에 환히 열린 꽃마당이 보인다 저승 대문 닫히기 전 저 꽃마저 보지 않으련 은근히 속삭이는 저승사자 뒤를 따라 걸어가는데 .. 2011. 1.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