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김복희3

김복희 「밤비에 자란 사람」 도깨비는 노래 좋아하고 빛나는 것 좋아하고 수수팥떡을 좋아해 도깨비는 힘이 장사고 긴 밤이든 짧은 밤이든 노는 것이 좋아 씨름 잘하는 둥근 어깨를 가졌을 것만 같아요 말라깽이 도깨비는 없을 것 같아요라고타령 시작하자마자  빼빼 마른 축 처진 어깨에 가방 자꾸 흘러내리는 도깨비 지나갑니다 지나갑니다심심하면 나랑 씨름합시다가방 추슬러 올리며 도깨비 휘청 말라 고속버스터미널 유리문 어깨로 밀며 야윈 나뭇잎과 마른 잔디 사이로 지나갑니다 가방만 보이는 것 같다 방심하지 마세요 도깨비 대신 말해주고 싶네요 지나갑니다 계절 지나갑니다 이대로 떠나기에 마음 요란해계절 바뀔 때더 아픈 사람들,아프면 많이 바쁠 텐데요 도깨비도 바빠요 막걸리 좋아하고 먹성도 좋아전국 방방곡곡 안 가는 곳 없이 돌아다닙니다 지나갑니다아픈 .. 2025. 3. 24.
김복희 「새 입장」 새 입장   김복희   대한민국에 사는 희망은 키가 작다. 발이 작다. 손이 작다. 그래도 성인용 속옷을 입는다. 어느 날 희망은 자신의 몸이 커졌다 느꼈다. 희망이 발을 쿵 구르자 현관 계단이 와르르 무너졌기 때문에, 희망은 드디어 내가 소인국에 왔군 올 곳에 오고야 말았어 흥분했다. 허물을 벗은 후 더 아름다운 뱀 더 커다란 뱀 태어나므로 희망은 두 발을 쾅쾅 구르며 계단을 완전히 부수고  허물을 부숴버리기 시작했다. 희망의 수화물에서 찾아낼 것들, 뾰족한 것, 날카로운 것, 폭발하는 것, 흔들리는 것, 살아 있는 것, 자라날지도 모르는 것. 새를 그려 넣은 것, 뱀을 그려 넣은 것, 죽음 근처에 엉켜 있는 것, 그것들 중 일부는 소시지, 곰팡이, 번데기, 씨앗으로 보인다. 다 빼앗겨도 별수 없는 것.. 2025. 1. 13.
김복희 「요정 고기 손질하기」 요정 고기 손질하기  김복희  쌀가마니 같네이 무게가 합하면아이 여러 명 같네 여기서 나온 국물과 살로먹일 입에는 좋은 일이네 이 생각이쌀가마니의 쌀을 다 털어 먹도록떠날 기색이 없어서 뼈를 정리했지뼈에서 분리한 숨을 모았어 이게 정말 맛있는 건데너무 가벼워 금세 사라져버린다니까입김에 날아가 버린다니까 나는 숨을 죽여야 했지 강아지 망아지 송아지그 모든 부드러운 혓바닥을느꼈던 순간을 합친 것보다더 조심스럽게 숨을 거둬두는 동안 나는 사람들을 헤아렸어사람을 사랑해서 의사가 되는 사람도 있고목회자가 되는 사람도, 사회운동에 투신하는 사람도 있고건물 아래로, 다리 아래로사람의 품으로 뛰어드는 사람도 있고사랑이 때와 재능을 만나 사랑만 하는 사람도 있지나는 요정을 사랑해서요정 고기를 손질하나 손질할 때마다가장 .. 2024. 6.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