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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강성은3

강성은 「스노볼」 스노볼 강성은 엄마 눈이 내려요 자꾸자꾸 내려요 매일매일 내려요 눈 쌓인 소나무 가지 위에 까마귀가 나무 아래 호랑나비와 장난 치는 고양이가 그대로 멈춰 있어요 누가 이곳에 온다면 차를 대접할 텐데 아무도 오지 않고 가끔 누가 우릴 엿보는 것 같아요 흰 눈 덮인 마을에 불을 지를까요 마을이 다 타버리기 전에 누가 달려와 불을 꺼줄지도 몰라요 겨울은 생각이 많은 시간이에요 생각이 저 눈을 내리게 해요 생각이 우릴 눈 속에 가두었어요 생각을 멈춰야 하는데 아무도 우릴 만나지 못할 거예요 여긴 어떤 슬픈 사람의 마음속인가요 ―――――――――――――――――――――――― 강성은 1973년 경북 의성 출생. 2005년 『문학동네』 등단. 시집 『구두를 신고 잠이 들었다』『단지 조금 이상한』. 아이들이 저승에 가서도.. 2020. 6. 11.
강성은 「그들의 식사」 그들의 식사 강 성 은 우리는 조용히 식탁에 둘러앉았다 그릇들이 각기 다 달랐다 아고타는 숟가락을 든 채 창밖의 봄을 바라보고 있다 푸르게 변해가는 화단을 바라보고 있다 공습경보가 울렸다 엄마는 불안한 눈으로 커피잔을 양손으로 쥔다 북서풍이 사납게 집 안으로 몰아쳐왔다 테이블 위에 있던 우유가 엎질러졌다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낡은 양탄자에 얼룩이 졌다 깜짝 놀란 아고타의 안경이 떨어져 깨졌다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안느가 문 앞에 떨어져 있는 엽서를 주워온다 안느가 깨진 유리조각들을 밟고 걸어와 다시 식탁에 앉는다 엽서를 읽는다 잘 있느냐 잘 있거라 식탁 아래 붉은 핏방울들이 조금씩 커져갔다 죽은 잎들이 창턱까지 쌓여 있다 흰 눈이 내렸다 우리는 조용히 식사를 한다 의자의 높이가 각기 다 달랐다 아고타가 떨.. 2016. 4. 19.
강성은 「커튼콜」 커튼콜 강성은 한밤중 맨홀에 빠진 피에로 집에 가던 중이었는데 오늘 공연은 만석이었는데 어째서 지금 이 구덩이 속에 있는가 그는 구덩이 속에 있는 자 분장을 지운 피에로 분장을 지워도 피에로 공중의 달에게 익살맞게 인사합니다 달님이여 그대는 지금 내 유일한 관객 밤새 내 곁을 떠나지 못할 거요 그는 구덩이 속에 있는 자 비좁은 구덩이 속에서 하염없이 공중만 보고 있다 삼십 년 동안 갈고 닦은 만담은 도무지 기억나지 않고 구덩이 속에서 지난 세월을 헤집어보지만 떠오르는 건 무대 뒤에서 혼자 분장을 지우던 날들뿐 여긴 말라버린 우물인가 고래 뱃속인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인가 달은 뿌연 커튼 속으로 서서히 모습을 감추고 빗방울은 조금씩 그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데 거기 누구 없소, 여기 사람 있어요! 누군가의 .. 2013. 5.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