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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강기원3

강기원「코끼리」 코끼리 강기원 오늘도 그녀는 위층 남자의 소변 소리에 잠을 깬다. 새벽 여섯 시, 한 번도 본 적 없는 남자는 오늘도 건재하시다. 누런 오줌줄기가 튀어 이마를 때리는 듯하다. 아니, 그가 뿜어내는 정액을 뒤집어쓴 듯하다. 묘한 모멸감 속에 그녀는 침상에 그대로 누운 채 한 마리 거대한 코끼리를 상상한다. 주체할 수 없는 긴 코를 새벽마다 사납게 휘두르는 코끼리. 어느 날 서커스장의 코끼리가 공연 도중 무대를 가로질러 도망갔다지. 의식 있는 코끼리라며 박수를 보냈었지. 추격 끝에 잡히고 만 코끼리가 위층에 갇혀 있는지도 모른다는 상상. 그러고 보니 쿵쿵 울려오는 발소리마저 사람의 것이라 하기엔 너무 느리고 둔중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그녀는 코끼리 발밑에 깔린 채 숨 쉬고 밥 먹고 잠든 것이다. 알 .. 2022. 4. 28.
강기원 「일요일의 일기」 일요일의 일기 강기원 월요일 돈을 빼앗겼다 화요일 놀림을 당했다 수요일 교복이 찢겨졌다 목요일 몸에 상처를 입고 피를 흘렸다 금요일 모든 것이 끝났다 토요일 드디어 해방됐다* 걱정인형을 무표정한 걱정인형을 안고 잠들었던 아이는 여섯 날의 일기를 써놓고 일요일의 일기를 쓰지 못했네 쓰지 못했네 일요일의 일기 걱정인형이 움푹 파인 눈동자 내려다보며 걱정인형이 올려다보는 천장에 목 을 맸 으 므 로 · · 일요일엔 *13살 학생의 일기 ―――――――――――――――――――――――――――――――――――――――― 강기원 1957년 서울 출생. 1997년 『작가세계』 등단. 시집 『고양이 힘줄로 만든 하프』 『바다로 가득 찬 책』 『은하가 은하를 관통하는 밤』. 수상. 『현대문학』 2014년 9월호, 180~181쪽.. 2015. 8. 14.
강기원 「장미의 나날」 장미의 나날 강 기 원 그 동네에선 우리 집 장미가 제일 붉었는데요 그래서 사람들은 집집마다 장미가 있었지만 유독 장미집이라 부르곤 했는데요 식구들이 모두 단잠에 빠져든 밤 아버진 휘늘어진 넝쿨 밑동에 아무도 모르는 거름을 붓곤 했는데요 나 홀로 깨어 아버지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았는데요 비밀스런 겹겹의 꽃잎은 뭉게뭉게 자꾸 피어나고 장미가 붉어지는 만큼 나와 동생은 자꾸 핼쑥해져갔는데요 그러고 보니 엄마의 낯빛도 갱지처럼…… 이상한 건 향기였지요 수백 수천 송이가 울컥거리며 피워내는 피비린내 마당을 넘어 집 안까지 기어든 넝쿨은 소파를 뚫고 곰팡이로 얼룩진 벽을 타고 생쥐가 들락거리던 아궁이 속에서도 붉게 검붉게 소문 같은 혓바닥을 내밀기 시작했는데요 그 무렵 우린 아버지의 주문 따위 필요 없이 스스로.. 2009. 9.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