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책이 나와서 그 책을 보는 사람이 많아지면 세상이 변할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된다.
하버드의 마이클 샌델 교수가 지은 "정의란 무엇인가"(이창신 옮김, 김영사 2010)*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을 때 나는 내가 얼른 그 책을 읽어야 한다는 생각보다 '이제 사회가 훨씬 더 정의로운 곳으로 변하겠구나!' 싶었다.
그 영향에 관한 기사 같은 걸 본 적도 없으면서 생각부터 먼저 했다. '책의 위력이란 이런 것이야!'
내심 책을 사고 책을 읽고 책이란 물건을 즐기는 자신을 위로해주기도 했다.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책이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고 나는 아직 그걸 사보려면 한참 걸리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 책이 이미 200만 부가 팔렸다고 했다. 정의를 그리워하는, 정의를 구현해보고 싶은, 눈앞에서 펼쳐지는 정의를 보고 싶은 열망의 지표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정말로 그 책을 읽은 것은 몇 년이 지나서였는데, 좀 읽어보고는 정의(正義)란 그리 편하게 읽을 수는 없는 것이구나 했을 사람, 나중에 다시 읽을까 생각한 사람도 있었을 것 같았고, 세상의 그 무엇이든 학자들에게 맡기면 간단히 한두 줄로 진술하지는 않는다는 걸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책을 끝까지 읽은 사람은 어떤 생각을 했을지도 짐작해 보았다. '그래, 정의란 바로 이런 거야!' 했을 것 같진 않았다.
심지어 '정의란 고약하구나. 뭐가 이리도 복잡하고 어려울까?' 싶어 할 사람도 많을 것 같았다.
책에 속은 건 한두 번이 아니긴 하다.
대표적인 사례 한 가지만 들면 A. 토플러의 "제3의 물결"이었다.
이 책은 전 세계적으로 우리나라에서 아주 많이 팔린 대표적인 책이라고 했었다. 그때 책 좀 본다는 젊은이 치고 옆구리에 그 책을 끼고 다니지 않으면 축에도 들지 못할 듯했었다. 어쨌든 책을 사놓고도 읽지 않은 사람은 많아도 책을 샀건 사지 않았건 그 책을 모르는 젊은이는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
21세기 정보화 시대를 예언한 책이었다. 다른 내용은 그만두고 우리 교육계가 몰입하고 있는 지식에 대한 내용만 이야기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토플러는 인간의 지적 능력을 기능적으로 분류하면 기억력, 관찰력, 판단력, 창조력으로 분류되는데, 기억력과 관찰력은 컴퓨터가 거의 대신한 지가 오래고(이미 1980년에?), 더구나 판단력도 컴퓨터가 거의 대신하고 있다며 창조력을 강조했다. 물론 어느 정도는 다 필요하지만 특히 그렇다는 말이었을 것이다.
그는 대개의 산업주의 국가에서는 '지금도'(=아직도, 1980년에도) 정규 교과목보다는 다른 세 가지 덕목을 강조하고 있는데 그것은 첫째 시간 엄수, 둘째 복종, 셋째는 기계적인 반복작업에 익숙해지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죽기 전에 우리나라(국회 등)의 초청으로 두 번인가 세 번인가 방한했다. 때마다 이런 교육("붕어빵 교육")을 해서는 안 된다고 연설했고, 대서특필되긴 했지만 우리 교육에 미친 영향은 내가 보기엔 전무했다.
그렇게 하고 2016년 87세로 타계했으니 이제 우리에게 그런 얘기를 해줄 사람도 없게 되었다. 아쉽긴 하지만 시간 엄수, 복종, 기계적인 반복으로 지식을 주입하는 데 힘쓰는 교육자들에게는 그의 죽음이 희소식이었을지도 모른다.
우리에게는 그냥 우리끼리 이러다가 말든지, 어떤 계기로 정신을 좀 차리든지 두 가지 방안이 있을 뿐이다.
토플러 이야기가 너무 길어졌다.
"정의란 무엇인가"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249).
정의를 도덕적 자격에서 분리할 때의 불안감은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일자리와 기회는 그것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 돌아가는 보상이라는 믿음은 특히 미국 사회에 깊이 뿌리 박혀 있다. 정치인들은 "열심히 일하고 규칙을 따르는 사람"은 앞서 갈 자격이 있다고 끊임없이 외치고, 아메리칸드림을 실현하는 사람들에게 성공은 미덕을 반영한다고 격려한다. 이러한 확신은 좋게 말해, 장단점이 있다. 이 확신에 집착하면 사회 결속에 걸림돌이 된다. 성공을 우리 노력의 결과로 여길수록, 뒤처진 사람들에 대한 책임감은 줄어들기 때문이다.
이 부분을 읽으며 생각했다. '그래, 맞아! 우리 젊은이들이 "노오력!" 하면서 기성세대를 쑥스럽게 해주었듯 그 대열에 끼지 못한 사람들이 불평불만을 하지 않을 리 없겠지.'
이런 생각도 했다.
인간이 붉은꼬리원숭이처럼, 침팬지처럼 살았을 저 아득한 옛날부터 힘센 존재들이 약한 존재들을 꼼짝 못 하게 억눌러온 것은 정의가 아닐까? 그쪽에서 보면 엄연한 정의겠지? 정의가 아니라면 그런 행태는 당연히 벌써 사라졌어야 하겠지? 힘이 약한 원시인이 낑낑거리는 걸 강한 쪽에서 좀 헤아려주는 배려나 은혜도 물론 정의였겠지? 지금도 그렇지 않은가? 그쪽에서 보면?
힘센 쪽이 힘 약한 쪽을 보고 그럴 리는 없겠지? "너희가 생각하는 바에 따라 정의(正義)를 정의(定義)하기로 하자,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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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이 책의 판권은 '미래엔'(주)이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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