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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내가 만난 세상

즐겁고 쓸쓸한 잡념(雜念)

by 답설재 2019. 4. 8.

 

 

 

 

  1

 

"여러 가지의 잡스러운 생각" "불도(佛道)의 수행을 방해하는 여러 가지의 옳지 못한 생각"이 잡념이랍니다. 나 참……. 그렇지만 나는 그 잡념을 참 좋아합니다.

퇴임을 하자 시간도 많아지고 게다가 하루하루 늙어가고 하니까 더욱더 그 잡념과 친하게 되었습니다.

무슨 생각을 하자고 정하지 않으니까 자연히 주제는 없습니다. 떠오르는 대로입니다. 그야말로 잡념입니다.

 

어떤 일이 떠오르면 그 생각을 따라가다가 그 일로 연상되는 사람들을 떠올려서 그리워하기도 하고 섭섭해하기도 합니다. 도움을 받은 이들, 도움을 준 이들, 내가 배신한 이들, 나를 배신한 이들, 내가 소원해진 사람들, 나에게서 멀어져 간 사람들……. 그리워도 섭섭해도 별 수 없기는 한 가지입니다.

 

주제가 없다고 했지만 그 잡념은 종류나 길이를 따질 수도 없고 끝을 이야기할 수도 없습니다.

무슨 결과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슨 소득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재미있습니다.

 

 

  2

 

이번에 고성에서 살다가 산불의 화마로 집이 불탄, 몇 년 간 쓴 원고까지 몽땅 잃어버린 안병영 전 교육부총리겸교육인적자원부장관이, 내가 교장이 되어 다니던 그 초등학교에 찾아와 5, 6학년을 대상으로 강의를 할 때 어느 아이가 취미가 무엇인지 묻자 그분은 서슴없이 "생각하는 것"이라고 하던 장면이 떠오릅니다.

어린 시절부터 생각하는 걸 좋아했다고 구체적인 일화를 들어 소개했습니다.

참으로 부러운 일이어서 내가 가르친(?) 그 아이들은 그 소중한 말씀을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겠으나 좀 엉뚱하게 나는 잊지 않았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잊은 적 없는' 나는 이제 별 수 없는 사람이 되어 있습니다. 인품다운 인품을 지니면 생각을 깊이 하게 되고 나처럼 어정쩡한 사람은 아무래도 쓸데없는 생각, 잡념이 많은가 보다 생각할 뿐입니다.

 

 

  3

 

잡념 중에서는 어린 시절에 관한 것이 썩 좋은 편입니다.

그때는 두려운 사람은 있었지만 그렇게 밉거나 섭섭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내 잡념은 잠시나마 모든 가능성을 가지고 훨훨 날아다니게 됩니다.

 

그다음으로 좋은 잡념은 한 여성을 만났을 때의 일들입니다. 쑥스러운 장면이 대부분이지만 내 마음속에서는 점점 더 고운 것으로 바뀌고 있는데, 유감스럽게도 그때로부터 오늘까지는 지워버리고 싶은 장면이 늘어나고 겹치고 해서 내 잡념은 점점 어두워지게 되고, 그래서 되돌릴 수 없는 일들이나 상황에 대해 꼭 가슴앓이를 하게 됩니다.

그러면 나는 머리를 흔들어 다른 잡념이 나를 사로잡도록 해버립니다.

 

 

  4

 

나는 아무래도 잡념들을 사랑하는 것 같습니다.

첫사랑처럼 누구에게 이야기하기는 싫고 이야기할 수가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어서 하는 말입니다.

누가 내 잡념을 다 파헤치게 되면 ("나도 그런 경향"이라면서) 그런 나를 한 인간으로는 인정해줄 사람이 전혀 없진 않겠지만 대부분은 "참 잡스런 인간"이라고 손가락질이나 할 것입니다.

 

이토록 잡념이나 좋아해서 주름살이 남보다 빨리 늘어나는가 싶기도 하고, 얼굴에 저승꽃이 일찍부터 피어올라 꼴사나운 것도 그래서 그런가 싶으면 부끄러워집니다.

아내도 몇 번인가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생각이 복잡한 인간은 얼굴도 그렇다는 것이었는데 나는 처음에는 그 얘기가 나를 두고 하는 건지도 몰랐습니다. '그런 인간이 더러 있긴 하지.' 매번 그렇게 생각하며 그 말을 들었습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이미 굳어져버린 '잡념에 몰입하기'를 그만둘 수는 없는 일입니다.

즐겁고 쓸쓸한 잡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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