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10.23.
Ⅰ
우연히 무대 장치들이 무너지는 수가 있다. 기상·전차·사무실 혹은 공장에서 네 시간, 식사·전차·네 시간의 일·식사·잠, 그리고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목요일 금요일 그리고 토요일, 똑같은 리듬에 따라, 이 길을 거의 내내 무심코 따라간다. 그러나 어느 날 <왜>라는 의문이 솟고, 그리하여 모든 것이 당혹감 서린 지겨움 속에서 시작된다.(알베르 까뮈, 민희식 옮김,『시지프스의 신화』육문사, 1993, 27).
『시지프의 신화』에서 이 부분을 읽으며 '그래, 맞아! 삶은 지겨움의 연속이야' 하고 생각한 것은, 1990년대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이 책은, 참 어쭙잖아서 공개하기조차 곤란한 어떤 이유로 그럭저럭 대여섯 번은 읽었는데, 그렇게 감탄한 그 몇 년 후 어느날에는 '뭐가 그리 지겨워? 곧 정년퇴임을 할 텐데…… 걸핏하면 한 달이 가고 두 달이 가고 일 년 이 년이 가는데……' 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하루하루의 생활을 지겨워하거나 무의미하다고 느끼는, 그것도 심각하게 느끼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으며, 그런 사람은 '내가 지금 그 신화 속의 시지프라는 인물과 뭐가 다를까?' 하고 생각할 지도 모릅니다.
시지프.
신화 속의 그 주인공은 신들로부터 형벌을 받았습니다. 삶의 기쁨과 즐거움에 충만하여 죽음의 신을 무시하고, 신의 명령을 거역한 죄입니다. 신들은 시지프에게 바위 하나를 산꼭대기로 끊임없이 굴려 올리도록 했는데, 그 바위는 산꼭대기에서 제 무게로 다시 떨어져 내리기 때문에 시지프는 지금도 그 바위를 굴려 올리고 있을 것입니다.
이 신화에 대해 알베르 까뮈는 다음과 같이 해석했습니다.
이 신화가 비극적이라면, 그것은 그 주인공이 의식적이기 때문이다.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성공한다는 희망이 그를 떠받쳐 준다면, 그의 고통이 대체 어디에 있겠는가? 오늘날의 노동자들은 그의 삶 속에서 날마다 똑같은 일을 하는데, 이 운명도 역시 못지 않게 부조리하다. 그러나 그 운명은 그것이 의식적인 게 되는 드문 순간들에만 비극적이다. 무력하고 반항적인, 신들의 프롤레타리아인 시지프스는 자신의 비참한 조건의 전 범위를 알고 있다. 그가 산을 내려오는 동안 생각하는 것이 바로 그 조건인 것이다(위의 책 161).
생명을 가지고 여기에 있는 동안은, 그렇지요, 산꼭대기를 향해 끊임없이 바위를 굴려 올려야 하는 운명임에도 불구하고, 여기 이승에 있는 동안에는 그 신들의 명령이 아무리 지엄하다 해도 내게 부여된 자유가 있습니다. 그 신들이 내가 반항하는 걸 못마땅해 하거나 말거나 내가 살아가는 건 절대적인 나의 자유입니다.
Ⅱ
전철역까지 타고갈 버스를 기다릴 때마다 저 산을 쳐다봅니다.
하루하루가 다릅니다.
모든 것이 그럴 것입니다. 저 자신도 그 대상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루하루가 달라진다는 그 사실조차 지겨울 수도 있고, 그게 뭐 대수냐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루하루가 다른 것은 지난봄에도, 여름에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돌이켜보면 지난해에도 그랬고
2010년, 2009년, 2008년…………………… 살아온 그 세월이 다 그랬습니다.
Ⅲ
내내 그랬던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살아온 것입니다.
그래서 늦었지만 지금부터라도 저렇게 하루하루가 달라지는 것을 고마워하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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