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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4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픽션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픽션들》송병선 옮김, 민음사 2011   열일곱 편의 단편소설집 이름을 아예 「픽션들」이라고 했는데도, 허구적 인물과 함께 실존 인물들이 등장하면서 스토리가 역사적 사실이라는 느낌을 갖게 한다.현학적·철학적이기도 하다. 각주들이 있어서 더 그렇다.충분한 설명을 해주는데도 문장 하나하나, 단어 하나하나를 놓치면 안 될 것 같았다.꿈같기도 한 줄거리에 호기심으로 따라가게 하고 뜻하지 않은 결말을 기대하게 한다. 고양이의 새까만 털을 쓰다듬는 동안, 그는 그 감촉이 꿈이며 자기와 고양이는 마치 유리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인간은 시간 가운데, 즉 연속성 가운데 살고 있지만, 마술적인 동물은 현재에, 즉 순간의 영원 속에 살기 때문이었다. 이건 「남부」에.. 2025. 2. 21.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기억의 천재 푸네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작품집 『픽션들』에서 「기억의 천재 푸네스」를 옮겨 썼다. 독후감을 써 놓는 것에는 별 의미가 없겠다고 생각해서였다. 나는 학생으로서 암기에 지긋지긋해했고, 교사로서, 교육행정가로서도 이 사회의 암기 혹은 기억에 대한 편중(偏重)에 지긋지긋해했다.그러나 내 힘으로는 그 막강한 성벽에 금이 가게 하기는커녕 내가 아무리 떠들어도 그 성벽 안 사람들은 눈도 깜짝하지 않는 걸 보았다. 그들도 그렇게 교육받고 그렇게 기억한 것으로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배경일 것 같았다. 기억이 중요하지 않다는 건 아니다. 기억이란 얼마나 소중하고 필요한 것인가.그렇지만 기억이, 기억을 위한 훈련이 교육의 최우선 덕목이 되고 있는 건 기이한, 비정상적인 현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 2025. 2. 20.
돈은 얼마나 좋은 것인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단편소설 「자히르」에는 돈이 얼마나 좋은지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소설집《알레프》). 잠을 이루지 못해 뭔가에 홀린 듯이 거의 행복한 마음으로 나는 돈보다 더 물질적이지 않은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사실상 어떤 동전이든지(가령 20 센터보짜리 동전) 가능한 미래의 창고이기 때문이다. 나는 "돈은 추상적이다. 돈은 미래의 시간이다."라고 되풀이했다. 그것은 외곽 지역에서의 어느 오후일 수도 있고, 브람스의 음악일 수도 있으며, 지도일 수도 있고, 체스일 수도 있으며, 커피일 수도 있고, 황금을 경멸하도록 가르치는 에피테투스(Epictetus 55?~135?, 스토아학파의 대표적 철학자)의 말일 수도 있다. 그것은 파로스 섬의 프로테우스보다 훨씬 더 변화무쌍한 프로테우스이다. 그것은 .. 2023. 9. 24.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알레프》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알레프》송병선 옮김, 민음사 2012       환상적, 초현실적인 세상을 그린 단편소설집이다.그런 세상을 사실처럼 그려놓아서 읽는 동안 그 세상에 빠져들게 했다. 출처를 밝히기도 하고 허구의 인물을 역사적인 인물들과 함께 등장시키기도 하고 작가 자신이 알고 있는 실제 인물과 실제로 있었던 일들을 끌어들이니까 이야기 내용이 마치 역사적인 일들처럼 인식되었다.인상 깊고 재미있다. 「죽지 않는 사람」「죽은 사람」「신학자들」「전사(戰士)와 여자 포로에 관한 이야기」 등 17편 중 「독일 레퀴엠」「신의 글」 두 편을 특히 감명 깊게 읽었다.  그것은 무작위로 선정된 (무작위처럼 보이는) 열네 개 단어로 이루어진 글이다. 내가 그 글을 큰 소리로 말하기만 해도 나는 전지전능한 존재가 될 .. 2023. 9.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