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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최하림2

최하림 「구석방」 산 아래 이 층 목조 건물은 긴 의자와 십여 개 유리창이 일제히 남으로 열려 있어 아침이면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밤에는 별들이 내려왔다 개들이 컹컹컹컹 짖어댔다 나는 고해성사실과도 같은 이 층 구석방으로 들어가 옷자락을 여미고 숨었다 구석방은 어두웠다 건축가 김수 선생님은 그날 지은 죄를 고하고 사함을 받으라고 구석방을 마련한 모양이지만 나는 고해할 줄 몰랐다 고해를 해본 적이 없었다 나는 죄의 대야에 두 발을 담그고 이따금씩 잠을 잤다 잠이 들면 새들이 소리 없이 언덕을 넘어가고 언덕 아래로는 밤 열차가 덜커덩덜커덩 쇠바퀴를 굴리며 지나갔다 간간이 기적을 울리며 가기도 했다 나는 자다 말고 벌떡벌떡 일어나 층계를 타고 내려갔다 냉장고 문을 열었다 우유를 꺼내 마셨다 토마토도 몇 개 베어 먹었다 밤은 .. 2014. 3. 16.
최하림 「버들가지들이 얼어 은빛으로」 버들가지들이 얼어 은빛으로 최하림(1939- ) 하늘 가득 내리는 햇빛을 어루만지며 우리가 사랑하였던 시간들이 이상한 낙차를 보이면서 갈색으로 물들어간다 금강물도 점점 엷어지고 점점 투명해져간다 여름새들이 가고 겨울새들이 온다 이제는 돌 틈으로 잦아들어가는 물이여 가을물이여 강이 마르고 마르고 나면 들녘에는 서릿발이 돋아 오르고 버들가지들이 얼어 은빛으로 빛난다 우리는 턱을 쓰다듬으며 비좁아져가는 세상 문을 밀고 들어간다 겨울과 우리 사이에는 적절한지 모르는 거리가 언제나 그만쯤 있고 그 거리에서는 그림자도 없이 시간들이 소리를 내며 물과 같은 하늘로 저렇듯 눈부시게 흘러간다 만약 올해의 입동(立冬) 소설(小雪)을 지나 '이젠 정말 춥구나' 싶을 때 우리에게 다시 겨울이 온 걸 느끼고 인정하는 시 한 편.. 2011. 12.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