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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첫눈4

거기도 눈이 왔습니까? 일전에 L 시인이 올해는 첫눈이 자꾸 내린다고 했습니다. 오늘 또 눈이 내렸습니다. 해가 중천에 올라온 것이 눈구름의 배경처럼 다 보이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눈은 줄곧 내렸고, 한때 펑펑 퍼부어 오늘 오기로 한 친구에게 점심약속을 미루자고 전화를 할까, 하다가 조금만 조금만 하는 사이 점심시간이 되었습니다. 눈은 그쳤는데 오늘 밤에 또 내린다고 했습니다. 어딘가 폭설이 내릴 거라는 예보도 들었습니다. 우리가 젊었던 시절의 일들이 자주 떠오릅니다. 내 친구는 점심을 먹으며 그게 일과가 되었다고 이야기해 놓고 조금 있다가 또 그 얘기를 했습니다. 나는 누구나 그렇다고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대꾸하면서도 애써서 노년의 의미를 찾은 시몬 드 보부아르를 생각했습니다. 그런 회상을 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 같고 그.. 2023. 12. 24.
최지은 「즐거운 일기」 즐거운 일기                                                                             최지은  11월에서 11월까지 그림 그리고 12월 마지막 날은 아무래도 슬퍼그림 그리다깜박 잠들기로 해요 당신이 꿈에 와 그간 이야기 들려주도록모른 척 잠에 빠지고 이파리 갉아 먹히듯 점점 꿈이 좁아지고잠이달아날 듯 말 듯 꿈이잊힐 듯 말 듯 당신이 떠나려는 사이에도 11월에서 11월이 가고또 다른 11월 가도록 깊은 잠 들기로 해요 눈 내리는 밤이면 나쁜 기억이 있어무서운 꿈을 꿨어요 그런 밤에도 눈을 기뻐하는 나의 늙은 개를 위해채소를 삶고 저녁을 짓고지친 마음은 그림 속에 주저앉히고무엇이든 넘치지 않도록얌전히 걸으며 그렇다 해도 12월의 끝혼자, 식은 .. 2021. 11. 19.
에이, 바보! 눈이 오잖아! 에이, 바보! 눈이 오잖아! 선물처럼 내리는 눈을 뭉쳐 선물처럼 안고 가는 아이 1 아파트로 올라오는 길섶과 소공원은 어수선합니다. 잔치가 벌어졌던 이튿날 아침의 마당같습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찬란한 빛깔이던 낙엽이 여기저기 수북수북 쌓여 있습니다. 금요일 오후여서 .. 2018. 11. 24.
재미있는 세상 알제리의 인근 영화관에서는 때때로 마름모꼴의 박하 과자를 파는데, 거기엔 사랑을 불러 일으키는 데에 필요한 모든 것이 붉게 새겨져 있다. 즉, ⑴ 질문들 : 「언제 나와 결혼할 거예요?」, 「나를 사랑해요?」 그리고 ⑵ 대답들 : 「미치도록」, 「내년 봄에」. 그 방법을 마려한 뒤에 사람들은 그것을 이웃 젊은이에게 일러 주고, 그러면 그 사람은 똑같은 식으로 응해 오거나 아니면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벨꾸르에선 이런 식으로 결혼들이 성립되어 왔고, 단순히 마름모꼴의 박하 과자를 교환함으로써 한평생을 서약해 왔다. 그리고 이것이 정말로, 이 지역 사람들의 어린애 같은 면을 보여 주는 것이다. ── 알베르 까뮈, 철학에세이 「알지에에서 보낸 여름」 중에서1 이 재미있는 일화를 소개한 까뮈는, 알제리의 .. 2012. 12.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