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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어린시절3

분꽃 기억 누나네는 우리 동네에 살았습니다. 누나들은 나이가 차면 한 명씩 한 명씩 차례대로 떠났습니다. 건넌방에서 혼자 지내면서 완전히 예뻐지면 마침내 마당에 동네 사람들이 다 모여 잔치를 벌였습니다. 그렇게 하여 그 누나가 사라지면 다시 그 아래 누나가 그 방에 들어갔고, 그렇게 두어 해 지내다가 떠나고 또 떠나고 했습니다. 누나들이 떠난 한적하고 썰렁한 방의 설합 속에는 늘 가루분이 흩어져 있었습니다. 나는 그 가루분이 분꽃 가루 같았고 그건 심각하게 따져볼 일도 아니었기 때문에 내내 그렇게 짐작하고 있었는데, 어제 어느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나오다가 마당 가의 분꽃 무더기를 보는 순간 누나들은 분꽃 가루로 분을 바른 건 아니라는 걸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 누나들은 나를 좋아하진 않았던 것 같습니다. 2017. 9. 14.
가브리엘 루아 『데샹보거리』 가브리엘 루아 『데샹보거리』 이세진 옮김, 이상북스, 2009 『내 생애의 아이들』 『세상 끝의 정원』 『그 겨울의 동화』를 쓴 캐나다 작가 가브리엘 루아가, 자신의 어린 시절을 이야기한 18편의 단편소설입니다. 재미있습니다. 세상의 온갖 것들을 알아가는 어린시절 이야기는, 그 어린시절이 기억의 저 아득한 곳에 묻혀버린 사람에게는 '그리움'에 관한 이야기이고, 그렇기 때문에라도 이런 이야기를 읽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가령 '결혼'이라는 주제나 '허니문' '연애질' 같은 것은 이런 것입니다. "결혼은 하면 안 되는 거예요?" 그러자 엄마는 어떨 때는 괜찮다고, 심지어 굉장히 좋은 결혼도 있다고 했다. "그런데 왜 어떻게든 조지아나 언니가 결혼하는 걸 막아야 해요?" "네 큰언니는 결혼하기.. 2014. 5. 11.
강기원 「장미의 나날」 장미의 나날 강 기 원 그 동네에선 우리 집 장미가 제일 붉었는데요 그래서 사람들은 집집마다 장미가 있었지만 유독 장미집이라 부르곤 했는데요 식구들이 모두 단잠에 빠져든 밤 아버진 휘늘어진 넝쿨 밑동에 아무도 모르는 거름을 붓곤 했는데요 나 홀로 깨어 아버지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았는데요 비밀스런 겹겹의 꽃잎은 뭉게뭉게 자꾸 피어나고 장미가 붉어지는 만큼 나와 동생은 자꾸 핼쑥해져갔는데요 그러고 보니 엄마의 낯빛도 갱지처럼…… 이상한 건 향기였지요 수백 수천 송이가 울컥거리며 피워내는 피비린내 마당을 넘어 집 안까지 기어든 넝쿨은 소파를 뚫고 곰팡이로 얼룩진 벽을 타고 생쥐가 들락거리던 아궁이 속에서도 붉게 검붉게 소문 같은 혓바닥을 내밀기 시작했는데요 그 무렵 우린 아버지의 주문 따위 필요 없이 스스로.. 2009. 9.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