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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쓸쓸함에 대하여2

우리만의 별실을 요구하는 이유 우린 우리만 있을 별실을 요구하는데, 그건 우리가 잘나서, 우리가 흘린 명언을 행여 누가 엿듣고 훔쳐 갈까봐 그런 게 아니라, 우리 중 반은 가는귀가 먹어서 그렇다. 그 사실을 공표라도 하듯 자리에 앉으면 엄지로 보청기를 귀에 꽂는 친구도 있지만, 아직 스스로 인정하지 않는 친구들도 있다. 우리는 날이 갈수록 머리숱이 줄어들고 안경을 쓴다. 우리의 전립선은 서서히 부풀어 오르고 있어서, 층계 끝 화장실 수통은 과부하게 시달린다. 그래도 우린 대체로 쾌활한 편이며 여전히 일을 하고 있다. 이야기는 익숙한 흐름을 따른다. …… ―줄리언 반스 《웃으면서 죽음을 이야기하는 방법》(다산책방 2016) 134. "이야기는 익숙한 흐름을 따른다"? 우리는 만나는 그 순간을 더욱 즐거워한다. 아직은 죽지 않았다는 사실.. 2016. 12. 6.
조정인 「문신」 문신 - 조정인 (1954 ~ ) 고양이와 할머니가 살았다 고양이를 먼저 보내고 할머니는 5년을 더 살았다 나무식탁 다리 하나에 고양이는 셀 수 없는 발톱자국을 두고 갔다 발톱이 그린 무늬의 중심부는 거칠게 패었다 말해질 수 없는 비문으로 할머니는 그 자리를 오래, 쓰다듬고 또 쓰다듬고는 했다 하느님은 묵묵히 할머니의 남은 5년을 위해 그곳에 당신의 형상을 새겼던 거다 고독의 다른 이름은 하느님이기에 고양이를 보내고 할머니는 하느님과 살았던 거다 독거, 아니었다 식탁은 제 몸에 새겨진 문신을 늘 고마워했다 식탁은 침묵의 다른 이름이었다 부끄럽지만 한때 내가 죽으면 그 무덤에 세울 비석에 새기라고 부탁할 글을 구상한 적이 있다. 그렇게 한다면 나를 만나보지 못한 내 후손 중에는 나를 무슨 중시조(中始祖)나.. 2011. 4.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