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고영민2

고영민 「돼지고기일 뿐이다」 돼지고기일 뿐이다 고영민 식당에서 김치찌개를 먹는데 건진 돼지고기 한 점에 젖꼭지가 그대로 붙어 있다 젖꼭지는 마치 처음 만난 나에게 꾸벅 인사하는 아이의 머리통처럼 보인다 돼지의 젖꼭지는 몇 개일까 이것은 새끼를 먹이던 그중의 하나 밥뚜껑에 건져내놓고 다시 천천히 밥을 먹는다 그냥 돼지고기일 뿐이다 돼지고기일 뿐이다 ― 시집 (문학동네)에서 《한겨레》 2016.1.8. 23면에서 옮김. 짐승들도 생각을 한다는 걸 읽었습니다.1 그럼 영혼도 있다는 얘기일까요? 어쩌면 다 쓸데없는 생각일 것입니다. 이 시를 찾아 다시 읽었습니다. 김치찌개를 먹고 있는 시인을 생각합니다. 무심코 나를 잠깐 바라보았던 나의 그 돼지들이 무심한 나 대신 굳이 저 고영민 시인을 찾아가 다른 돼지들과 섞여 함께 꿀꿀거리면 세상에!.. 2017. 8. 17.
고영민 「앵 두」 앵 두 고영민 그녀가 스쿠터를 타고 왔네 빨간 화이바를 쓰고 왔네 그녀의 스쿠터 소리는 부릉부릉 조르는 것 같고, 투정을 부리는 것 같고 흙먼지를 일구는 저 길을 쒱, 하고 가로질러왔네 가랑이를 오므리고 발판에 단화를 신은 두 발을 가지런히 올려놓고 허리를 곧추세우고, 기린의 귀처럼 붙어 있는 백미러로 지나는 풍경을 멀리 훔쳐보며 간간, 브레끼를 밟으며 그녀가 풀 많은 내 마당에 스쿠터를 타고 왔네 둥글고 빨간 화이바를 쓰고 왔네 깨끗한 솜씨와 감각이다. 시 쓰기 시험이 있다면 모범답안 가운데서 빠질 리 없을 것이다. “둥글고 빨간 화이바”의 그녀 얘기가 ‘앵두’란 두 음절의 제목에 받쳐져 산뜻한 균형과 더불어 아연 생기롭다. ‘앵두’ 쪽에서도 마찬가지. “빨간 화이바”의 그녀와 나란히 놓임으로써 예기치.. 2010. 1.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