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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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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리스트 《내 친구 쇼팽》

by 답설재 2016. 7. 27.

프란츠 리스트 《내 친구 쇼팽》

이세진 옮김, 포노, 2016

 

 

 

 

 

 

다른 음악가가 선율과 화성에 그렇게 빼어난 재주가 있었다면 현악기의 노래, 플루트의 나른한 음색, 쩌렁쩌렁한 나팔 소리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는 못 배겼을 것이다.(12)

 

쇼팽은 요란한 오케스트라 사운드에 야심을 두지 않았고 자기 생각을 온전히 상아 건반으로 옮기는 데 만족했다. 합창이나 합주의 효과, 무대미술가의 수완을 끌어들이지 않으면서도 작품의 힘은 절대 뒤지지 않는다는 본인의 목표에 도달했다.(13)

 

쇼팽은 체질이 워낙 병약한 사람인지라 정력적으로 열정을 표현하지 못했다. 그는 친구들을 온화하고 다정한 천성으로만 대했다. (…) 쇼팽과 자주 만나며 가깝게 지냈던 이들은 이따금 그의 조바심을, 모두가 믿는 모습대로 살아가는 따분함을 감지했다. 그러한 인간 쇼팽의 한은 예술가 쇼팽이 풀어주지 않았을까! 그는 조바심을 격정적인 연주로 풀기에는 몸이 너무나 약했기 때문에 작곡으로 그 한을 풀었다. 그는 자기 작품들이 힘차게 연주되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그의 작품들에는 털어놓고 싶지 않은 상처가 있는 인간의 만감이 흩어져 있다.(24)

 

― "인간 쇼팽의 한"은 "예술가 쇼팽"이 풀어주지 않았을까!

 

'낭만주의의 선구자' '피아노의 전설' '피아노의 신'으로 불리는 헝가리 출신의 프란츠 리스트(1811~1886)가, '피아노의 시인' 프레데리크 쇼팽(1810~1849)의 일생과 음악을 찬양한 책이다.

 

 

 

1950년대의 그 우중충한 국민학교 교실에서 본 얄팍한 음악 교과서 속의 리스트와 쇼팽, 풀리지 않을 무슨 기호 같은 이름으로만 남은 그 음악가들에 대해 이제와서 이 책을 읽어 그 이름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게 된 것은, 실로 감명깊은 일이다.

 

쇼팽의 음악이 혹 조금 들리기 시작할 수도 있을까…….

 

타고난 기질과 성격, 작곡과 연주 스타일은 전혀 달랐다. 그러나 두 천재 음악가는 서로의 다름에 끌렸던 것일까. 리스트는 쇼팽의 섬세하고 세련된 음악을 열광적으로 찬양했고, 쇼팽은 "내 곡을 연주하는 그의 방식을 훔치고 싶은 심정"이라고 고백할 만큼 리스트의 빼어난 기교와 힘에 매료되었다.(222)1

 

리스트와 쇼팽은 성정이나 생활태도까지도 너무나 달라서 그 우정이 오래가지 못했고, 여자 친구들(리스트의 마리 다구 백작부인과 쇼팽의 조르주 상드 부인)끼리의 관계마저 틀어지면서 두 사람은 더욱 멀어졌다.

그러나 쇼팽이 상드 부인과 헤어진 2년 후에 세상을 떠나자 리스트는 진심으로 슬퍼하며 연인 비트겐슈타인 공작부인의 도움을 받아 이 책을 썼다고 한다.

 

 

 

리스트의 문장은 시적(詩的)이다.

 

그의 작품은 마치 눈물을 담아놓은 단지처럼 젊은 날의 모든 추억, 마음을 사로잡았던 모든 매혹, 표현하지 못했던 열망과 격정을 담고 있다. 또한 그는 자기 방식을 온전히 이해하기에는 너무 무딘 우리의 감각, 너무 하찮은 우리의 지각의 틀에 매이지 않고 숲의 요정, 산의 요정, 바다의 요정 들의 세계로 뛰어들었다. (…) 우리가 노력한들 무슨 결과가 있단 말인가? 우리가 쇼팽의 연주를 들어보지 못한 자들에게 그 형용할 수 없는 시정의 매혹을 제대로 이해시킬 방법이 있을까? 그 매혹은 마편초나 칼라 같은 가벼운 이국적 향기처럼 섬세하면서도 사람 속을 꿰뚫는다. 사람이 자주 드나들지 않는 집에서만 맡을 수 있고 인파가 북적대는 곳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향기다.(82~83)

 

그 노래들은 꽃향기가 퍼지듯 흩어지고 사라졌다. 사람이 살지 않는 땅에 피어난 꽃들이 우연히 찾아온 낯선 여행자의 길을 향기롭게 한다. 우리는 폴란드에서 쇼팽이 작곡했다고 전해지고 실제로 그렇게 볼 만큼 아름다운 노래를 몇 곡 들었다 하지만 이제와서 어찌 감히 쇼팽이라는 시인의 영감과 그 나라 국민의 영감을 구분할 수 있겠는가?(171)

 

전편을 서정적, 문학적 표현으로 일관하여 쇼팽의 모든 것을 최대한으로 이야기하고 싶어 한 것 같았다.

 

1장 전반적인 작품 성격

2장 폴로네즈

3장 마주르카

4장 비르투오시티

5장 인간 쇼팽

6장 젊은 날

7장 렐리아2

8장 만년, 최후의 순간

9장 결론

 

2장(폴로네즈), 3장(마주르카)에서는 음악과 춤을 중심으로 역사적 배경, 폴란드인의 기질과 품성, 춤의 특징과 기법, 이 음악의 대가들에 대하여 쉽고 재미있게 배우는 듯한 느낌이었다.

4~8장에서는 작품, 조국애, 작가 조르주 상드 부인과의 사랑, 사교와 우정, 레슨, 병마와의 싸움, 내면 세계를 보여주었다.

 

 

 

멋지게 정리해서 어린 날들의 그 국민학교 교실에 이 정리를 보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가령 2장에서 '폴로네즈'에 대해 읽으며 밑줄을 친 부분이다. 이런 부분들을 연결하면 그렇게 정리될 것 같았었다.

 

폴로네즈는 쇼팽의 영감이 가장 아름답게 어려 있는 작품이다.(28)

 

지나간 시대의 폴란드인들은 사내다운 패기와 사랑하는 이에게 바치는 뜨거운 헌신을 겸비했다.(29)

 

쇼팽의 폴로네즈를 몇 곡 듣고 있노라면 온갖 부당한 운명을 향하여 용감하고 당당하게 행진하는 사내들의 단호하고 진중한 발소리를 듣는 것 같다.(31)

 

선율은 표현력 넘치는, 때로는 몽상적인 노래로 활짝 꽃을 피웠다. 선율은 젊은이들의 심장에만 말을 걸었고, 시적인 환상을 불어넣었다. 이제는 높고 심각한 자들의 발걸음에 장단을 맞춰줄 필요가 없었다.(47)

 

쇼팽은 경쾌한 진행 속에서도 우울하고 억눌린 느낌을 낼 수 있지 않았나? 영광을 노래한 후에 고통을 노래하지 않았나? 승리를 거듭 표현한 후에 슬픔에 빠진 패자들과 함께 울어주지 않았나? 이것이야말로 쇼팽의 단연 뛰어난 점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는 이 주제가 표현될 수 있는 모든 면모를 포용했고, 이 주제에서 환하게 빛날 수 있는 것과 슬픔에 젖을 만한 것을 다 드러냈다.(50)

 

그러나 그게 어려워서 책의 디자인이나 살펴보다가 이 책의 다른 제목을 생각해보았다.

《시인의 영혼》

이 책이 쇼팽을 주제로 한 리스트의 시집이라면 시집을 어떻게 요약할 수 있나, 생각하기로 했다.

 

 

 

쇼팽의 작품들은 머나먼 나라들과 아득한 후세에까지 전해질 운명이다. 예술 작품은 그러한 기쁨, 위안, 그렇게 이롭게 작용하는 감정을 고통받고, 지치고, 갈급하고, 오래 참고, 믿음을 잃지 않은 영혼 속에 일깨운다. 쇼팽의 작품들은 그런 영혼들에게 바쳐진 것이다. 지구상의 어느 곳에서 살고 어느 시대를 살아가든, 고결한 성품의 소유자들이라면 그의 작품을 통하여 연대를 이룰 것이다.(88)

 

내가 음악을 공부했다면 이 책을 가지고 뭘 좀 아는 척하며 돌아다닐 수 있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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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옮긴이(이세진)의 글.

2. 1836년, 조르주 상드는 《앵디아나Indiana》, 《발랑틴Valentine》, 《자크Jacques》뿐만 아니라 《렐리아Lelia》도 발표했다.(본문 17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