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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세월47

그렇게 더워요? 남양주시청에서 발간하는 『쾌한도시』 8월호 표지 뒷면입니다. 전철을 타고 오며 펼쳤습니다. 철썩 철썩 파도소리와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아빠, 엄마와 함께 쌓던 모래성, 혹시라도 파도에 쓸려 내려갈까 조심조심 토닥이며 한 단, 한 단 모래를 쌓으면 아슬아슬한 나만의 성이 맞이해 준다. 이 글과 그림을 보며 아무것도 없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던 나의 여름방학들을 생각했습니다. '모래성'은 무슨…… '아빠, 엄마'는 무슨…… 나는 방학만 되면, 방학숙제를 했다 하면, 커다란 수박과 넓고푸른 바다를 그렸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저 위의 저런 그림과 글들이 주는 막연한 '기대'를 생각하고 그리워했습니다. 내게도 무슨 일이 일어나든 일어나겠지 이번이 아니라면 언젠가는 일어나겠지 그렇게 여섯 번의 여름방학과 여.. 2013. 8. 14.
오며가며 Ⅱ 2012.10.23. Ⅰ 우연히 무대 장치들이 무너지는 수가 있다. 기상·전차·사무실 혹은 공장에서 네 시간, 식사·전차·네 시간의 일·식사·잠, 그리고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목요일 금요일 그리고 토요일, 똑같은 리듬에 따라, 이 길을 거의 내내 무심코 따라간다. 그러나 어느 날 라는 의문이 솟고, 그리하여 모든 것이 당혹감 서린 지겨움 속에서 시작된다.(알베르 까뮈, 민희식 옮김,『시지프스의 신화』육문사, 1993, 27). 『시지프의 신화』에서 이 부분을 읽으며 '그래, 맞아! 삶은 지겨움의 연속이야' 하고 생각한 것은, 1990년대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이 책은, 참 어쭙잖아서 공개하기조차 곤란한 어떤 이유로 그럭저럭 대여섯 번은 읽었는데, 그렇게 감탄한 그 몇 년 후 어느날에는 '뭐가 그리 지겨워.. 2012. 10. 30.
슈테판 츠바이크 『이별여행』 슈테판 츠바이크 『이별여행』 배정희·남기철 옮김, 이숲, 2011 『슈테판 츠바이크의 마지막 나날』(로랑 세크직, 현대문학, 2011)을 읽은 적이 있다. 그 책의 주인공인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 이야기다. 세계 3대 전기작가 중 한 명이라는 말도 있다. 표지부터 좀 재미있다. 웃기는구나 싶었다. 슈테판 츠바이크가 찍은 사진일 것 같진 않고, 2011년 그러니까 지난해에 유럽에서 영화로 제작 중이라고 했으니 제작 중인 그 영화의 선전물인가 싶기도 하지만 추측일 뿐이다. 이 표지 때문에 남들 보는 데서 읽기가 좀 난처했다. 남녀 간의 모습을 보여주려면 이보다는 좀 품위 있는, 혹은 차라리 더 선정적인 사진을 구했더라면 싶었다. 저게 도대체 뭐 하자는 건지, 원…… ♣ 루트비히는 굴욕적인 가난으로 얼룩졌던 어.. 2012. 7. 13.
사촌누나 사촌누나는 지금 문경에서 살고 있습니다. 웬만한 나이가 되면 흔히 그럴 것 같기는 하지만, 누나는 삶에 지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또 그런 생각이 들면 이 세상이 원망스러워집니다. 우리가 시골 살 때, 정말 아무것도 없이 그렇게 살 때, 명절이나 제사 때 찾아가던 우리 큰집은, 속리산 깊은 계곡의 '도황골'이라는 산골짜기에 있었습니다. 백부께서 정감록(鄭鑑錄)을 아주 좋아하셔서 장차 난을 피한다며 그 골짜기로 들어가셨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난(亂)이라면 그 판단 자체가 난(難)이었을 것입니다. 백부의 그 판단은 당연히 어려운 살림의 근본 원인이 되었고, 그 골짜기를 나와서도 한동안 지난함이 계속되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교과서에 나오는 '의 좋은 형제'보다 더 우애로운 분이어서 농사가 끝나면 '형님댁'.. 2012. 5. 16.
옛 담임교사가 생각납니까? 연말에 망년회를 했다면서 어느 아이(?)가 핸드폰에 보내준 사진입니다. 1978년에 담임했던 '아이들'입니다. 함께 저 '참이슬'이나 '하이트'를 마실 수 있으면 더 좋았겠지만 이 사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눈물겹습니다. 이제 조용하니까 그 동네가 자주 생각나고, 아직도 기억 속에는 그 마을의 어려운 모습들이 생생하게 남아 있지만, '나에게는' 세월이 많이 흘렀습니다. 이 '애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여기에 이 사진을 실어놓고 심심할 때, 외로울 때, 생각날 때 열어보면 좋을 것 같았습니다. ♬ 여러분도 옛 담임교사가 더러 생각납니까? 그 담임교사가 어떻게 생각됩니까? 담임을 했던 그분은 여러분의 어린 시절을 얼마나 기억할 것 같습니까? 나는 그렇습니다. 이 '애들'의 그때 .. 2011. 12. 30.
1970년대의 어느 날 1970년대의 어느 날 ♬ 1970년대 중반이나 후반의 어느 날이었을 것입니다. 옷차림이나 분위기나 다 촌스럽습니다. 저 즈음엔 무엇이든 열심히 한다고 했지만, 하루하루 살아가는 게 지금보다 훨씬 어려웠고, 힘들었고, 암울했으며, 살펴야 할 주변이 넓어서 지금 생각하면 정작 꼭 살폈어.. 2011. 9. 25.
조정인 「문신」 문신 - 조정인 (1954 ~ ) 고양이와 할머니가 살았다 고양이를 먼저 보내고 할머니는 5년을 더 살았다 나무식탁 다리 하나에 고양이는 셀 수 없는 발톱자국을 두고 갔다 발톱이 그린 무늬의 중심부는 거칠게 패었다 말해질 수 없는 비문으로 할머니는 그 자리를 오래, 쓰다듬고 또 쓰다듬고는 했다 하느님은 묵묵히 할머니의 남은 5년을 위해 그곳에 당신의 형상을 새겼던 거다 고독의 다른 이름은 하느님이기에 고양이를 보내고 할머니는 하느님과 살았던 거다 독거, 아니었다 식탁은 제 몸에 새겨진 문신을 늘 고마워했다 식탁은 침묵의 다른 이름이었다 부끄럽지만 한때 내가 죽으면 그 무덤에 세울 비석에 새기라고 부탁할 글을 구상한 적이 있다. 그렇게 한다면 나를 만나보지 못한 내 후손 중에는 나를 무슨 중시조(中始祖)나.. 2011. 4. 21.
나는 도대체 몇 살인가? 나는 얼마 전까지는 만 62세였고 생일이 지났으니까 지금은 만 63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민등록상의 나이이고 사실은 만 63세였다가 지금은 만 64세입니다. 출생 신고가 한 해 늦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나이로는 65세이니 올해의 내 나이는 무려 네 가지입니다. 좀 성가신 일이고 밝혀봐야 별 수도 없고 흥미도 없는 얘기지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어디 가서 누가 나이를 물으면 그 네 가지 중에서 적당히 가려 대답하고 있지만 만 64세(생일 전에는 63세)인 정확한 나이는 주로 마음 속으로만 생각하고 공식적으로 써먹을 데는 없습니다. 애초에 면사무소에 등록된 1947년은 선친이 어떻게 신고한 것인지 한 해가 늦어진 것입니다. 그건 내가 병술(丙戌)생 개띠라는 걸로 알 수 있습니다. 생일도 음력인데 그 날짜가.. 2010. 11. 19.
가을엽서 (Ⅲ) : 金源吉 詩人에게 가을엽서 (Ⅲ) - 金源吉 詩人에게 가을입니다. 기대하지도 않고 욕심을 내지도 않았는데도, 가을입니다. 하기야 그 변화에 기대를 하는 건, 그야말로 ‘자유’지만 욕심을 내거나 할 일이 아니라는 건 누구나 다 압니다. 다만 다시 한해가 저물고 있다는 것에서 느끼기로는 오히려 좀 천천.. 2008. 9. 30.
세 월(Ⅱ) 지나는 길의 개나리가 이야기합니다. "봐, 노랑이란 바로 이런 색이야." 누군가 모를 무덤가에는 진달래가 곱습니다. 멀리에서 복사꽃도 담홍색의 진수(眞髓)를 보여줍니다. 복사꽃 마을 사람들은 아직도 1960년대나 70년대의 그 정서로 살아가고 있는데, 어쩌다가 나만 이렇게 멀리 와 있는 것 같습니다. 뭐가 그리 급한지, 봄꽃들은 잎보다 먼저 피어나 곧 아지랑이 피어오를 봄을 ‘희망’만으로 이야기하지만, 나처럼 세월의 무상함을 이야기하려는 사람에게는 T.S. 엘리엇의 말마따나 그 희망이 잔인하다는 느낌을 줍니다. 어린애들이나 소년소녀들은 저 꽃들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을까요? 아름다움이란 나이가 들면서 이렇게 얼굴이 무너지고 마음이나 정서도 그만큼 누추해져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아무래도.. 2008. 4. 9.
세 월 (Ⅰ) : 나의 일생 살다 보니까, 산다는 것의 리듬이, 생각 없이 자고난 겨울날 새벽 창밖에 쌓인 눈의 경이로움 같은 것으로 느껴질 때도 있기는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차츰 겨울이 와도 그만이고 가도 그만이고, 그래서 플라타너스 -가로등을 배경으로 서 있는 봄날 초저녁의 그 싱그러운 자태- 를 보아도 별로 생각나는 것도 없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고, 어느 날 이번에는 여름이 와도 그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앞산의 온갖 푸나무가 초록을 넘고 넘어 숨차도록 푸른데도 동해 - 그 그리운 바닷가에 갈 일이란 전혀 없어져버리고, 그 다음에는 가을이 와서 낙엽이 지고 겨울이 오는 거야 너무도 당연하여, 추억에 젖어 ‘사계(四季)’나 ‘무언가’(無言歌, 멘델스존) 그런 음악을 들어보는 일도 우습고 웬지 좀 부끄럽기도 하고 차라리 시시하게 .. 2008. 4.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