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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세월47

또 한 달이 가버렸네 느낌으로는 오늘이 아직 어제 같다. 이러다가 내일도 아직 그제인 줄 알지도 모르겠다. 뒷 담장의 마른풀을 정리한 것이 어제 같은데 이미 일주일 전이란다. 새벽이면 하루의 시작이구나 하지만 금세 점심을 먹게 되고 곧 저문다.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됐지? 저녁을 먹고나서 '오늘 밤에는 책을 좀 많이 읽어야지' 다짐하며 조금만 쉬었는데 어? 곧 이슥해져서 아내가 잠자리에 드는 걸 보고 말없이 놀라워했다. 나는 멍청이가 된 것인가? 늙은 사람의 시계는 정말 더 빨리 가나? 시계 공장에서 고약한 시계를 따로 만드나? "착시 중 하나가 나이를 먹을수록 시간이 빨리 지나간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얼마 전에 밝혀졌어요. 알고 보니까 어렸을 때 뇌의 신경세포 정보 전달 속도가 나이 들었을 때보다 훨씬 더 빠릅니다... 2021. 2. 1.
한복 차림 서울여인 # 1966년 삼각지 로터리 어디쯤이었습니다. 몇몇 집에서 저녁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배가 더 고팠습니다. 만나기로 한 사람을 기다리는데 하필이면 부슬부슬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비안개가 자욱했습니다. 저기쯤 치마저고리를 입은 새색시가 보였습니다. 비를 맞는 건 똑같은데 그녀는 곧 사랑하는 이와 만날 것이어서 다 괜찮았습니다. 그녀가 사랑하는 그는, 저녁 준비를 해놓고 골목 어귀에 나와 기다리는 그녀가 부끄러워서 다정한 표정만으로 그녀를 포옹해주며 집으로 들어갈 것인데 나는 집도 없고 아무도 없었습니다. 나는 그렇게 예쁜 여인을 처음 보았습니다. 변함없이 암울한 한 해였고 세상이 돌연 다채로운 빛깔로 보이게 된 한 해였습니다. # 1971년 교사가 되어 시골 학교에 발령받은 나는 3년째에 6.. 2020. 12. 20.
미라보 다리아래 센 강이 흐르고 아침에 눈이 내렸습니다. 문득 고등학교 때 국어 선생님 생각이 났습니다. 그분이 우리들을 바라보다가 창밖을 내다보며 아폴리네르의 시를 암송하시던 장면입니다. 선생님은 청춘이었을 것입니다. 빛났어야 할 우리 선생님의 청춘...... 미라보 다리 아래 센 강은 흐르고 우리의 사랑도 흘러내린다 내 마음 깊이 아로새기리 기쁨은 언제나 괴로움에 이어서 옴을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세월은 가고 나는 머문다 손에 손을 잡고 마주 보면 우리의 팔 아래 다리 밑으로 영원의 눈길을 가진 지친 물살이 저렇듯 천천히 흘러내린다 밤이여 오라 종이여 울려라 세월은 가고 나는 머문다 사랑은 흘러간다 저 물결처럼 우리의 사랑도 흘러만 간다 ......................................... 선생님은 살아계.. 2020. 12. 13.
외손자와 놀던 곳 일주일에 서너 번은 저 계곡으로 들어갔다 나오곤 합니다. 그때마다 이 개울을 확인합니다. 녀석이 어디쯤에서 바지를 걷고 물속을 들여다보았지? 할머니는 어디서 녀석을 바라보았지? 그때 우리는 어떤 대화를 나누었을까? 그 대화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초등학교 6학년 여름방학 때였습니다. 한 해 월반을 해서 지금은 대학 2학년입니다. 코로나만 아니면 훨씬 더 좋겠는데, 매일처럼 홍대 앞에 나갈 수 있을 텐데 그렇지만 잘 지내기를, 내가 전혀 생각나지 않을 만큼 신나는 나날이기를 저곳에서 생각하고, 다시 올라갑니다. 2020. 9. 21.
자메 티소 '10월' 나의 기억들은 하나둘씩 총총걸음으로 사라져갑니다. 이 해의 시월조차 아주 단순한 숫자가 되어갑니다. 떠난지 이틀째인데 쓸쓸합니다. 뒷모습이 화려하고 쓸쓸했던 여인, 저렇게 총총 돌아서가는 저 여인이 아름다워서 차 한 잔 하고 가라든가 하는 말들은 공연한 일, 쑥스러운 일일 것 같고 옆구리에 낀 그건 어떤 책인지나 물어봤어도 좋았을 것입니다. 여인은 화가 자메 티소의 연인이었고, 아버지가 다른 세 아이와 살아가고 있었답니다.1 ...................................................... 1. 2019년 10월 22일, 한국경제신문에 소개되었습니다. 한국경제신문 사이트의 검색창에 '자메 티소 10월'을 넣으면 그림과 해설을 볼 수 있습니다. 2019. 11. 2.
벚꽃이 피었다가 집니다 그 동네는 어떻습니까? 이 동네에선 엊그제 벚꽃이 피기 시작했습니다. 오일장날 난전의 '펑튀기'가 떠올랐습니다. 깔깔거리고 웃던 아이들도 생각났습니다. 어느 날 담임 선생님께서 "시끄럽지요?" 하고 묻길래 "아이들이니까요. 나 같은 노인은 떠들지도 못해요" 했더니 "그래도 교장실 옆이어서 신경이 쓰이는 걸요" 해서 "교장은 하는 일이 없어서 상관없어요" 했는데 선생님은 예쁜 미소를 지으며 돌아서서 나갔습니다. 지금 그 선생님은 또 꽃 같은 아이들을 데리고 어떤 교장과 이야기하고 있을까요? 괜히 또 옛 생각 때문에 이 글도 '또' '괜히' 길어질 뻔했네요. 엊그제 그렇게 피기 시작한 것 같은 벚꽃은 어제는 어찌할 도리가 없을 정도로 만개하고 있었습니다. 한꺼번에 그렇게 피어나면 세상의 그 누구도 어떻게 할.. 2019. 4. 18.
달력 몰래 넘기기 1 달력을 넘기려고 하면 섬찟한 느낌일 때가 있습니다. '뭐가 이렇게 빠르지?' 붙잡고 있는 걸 포기해버리고 싶고, 아니 포기하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어서, 이내 평정심을 되찾습니다. '어쩔 수 없지.' 2 '또 한 달이 갔어? …… 우린 뭘 했지? …… 그냥 이렇게 살아가는 거야?' 털어내야 할 것들, 정리하고 준비해야 할 것들, 해결해야 할 것들…… 온갖 것들이 현실적인 과제로 다가오기도 하지만, 아내가 그렇게 따지고 들 것 같은 초조감도 없지 않습니다. 사실은 그런 질문들이 점점 현실적인 것으로 다가옵니다. 3 그런 '숙제'가 싫습니다. 해결되거나 말거나 정리할 게 있거나 말거나 그냥 지내면 좋겠습니다. 덥거나 말거나 언제까지나 8월이고, 언제까지나 이렇게 앉아 있을 수 있으면 그만이겠습니다. 이 .. 2018. 9. 1.
돌연 가을? 돌연 가을? 8월 15일, 한 달 가까이 계속된 열대야에 시달리며 "이 무더위는 아직 언제까지일지 모른다"는 이야기에 기가 막혔는데 웬걸, 이튿날부터는 기온이 사정없이 내려가서 만나는 사람마다 즐거움이 담긴 표정, 시원한 느낌이 스민 음성으로 "살 만하다!" 했고, 이번엔 무슨 거창한 .. 2018. 8. 26.
봄여름가을겨울 그 미칠 것 같았던 봄여름가을겨울 텅 빈 채였던, 아무것도 없었던 봄여름가을겨울 나를 속이고 간 봄여름가을겨울 이제 와서 보이는 저 가을 그런데도 거기에 나는 보이지도 않는 가을 2017. 10. 9.
"이제 겨울이죠 뭐!" "이제 겨울이죠, 뭐!" 그 개인택시 기사는 느직하게 나가고 일찌감치 들어옵니다. 택시를 취미 삼아 하는 사람 같고, 걸음걸이도 한 걸음 한 걸음 의식적으로 내딛는 것 같습니다. 그는 어엿한 '직장인'이지만 피차 할 일도 없이 지내는 사람들처럼 우리는 초저녁에 샤워장이나 탈의실에서.. 2017. 8. 23.
월간지 표지 사진 책을 들고 있던 시간들은 어디로 갔을까…… 기억들을 따라 서글픔이 밀려온다. 1. 2개월 전, 1, 2년 전 책도 그렇고 오래된 책은 더욱 그렇다. 모호하거나 짜증스럽거나 뭔가 초조해서 읽지도 않고 넘겨버린 글도 있었던 그 많은 시간들…… 우루루 몰려와 그렇게 머물던 그 수많은 시간들, 나를 여기에 데려다 놓은 그 시간들, 어디로 가고 있을까. 되돌아올 수나 있는 길에 있을까. 그것들……. 2017. 7. 27.
세월 2017. 5.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