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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사랑63

마르그리트 뒤라스 『모데라토 칸타빌레 Moderato Cantabile』 마르그리트 뒤라스/정희경 옮김 『모데라토 칸타빌레 Moderato Cantabile』 (문학과지성사, 2009, 1판6쇄) 외간남자는커녕 '외출'이라는 단어조차 몰랐을 것 같은 숙녀가 있습니다. 그녀가 어느 날 '죽음으로써 완결되는 절대적 사랑'을 찾아나선다면, 소설은 포르노처럼 되어버릴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그런 소설을 쓴 적도 없을 뿐만 아니라 『모데라토 칸타빌레』는 '실화가 아닌 한'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 안 데바레드는 소도시 공장주의 아내로 아들 하나를 두고 있습니다. 그녀는 10년 전 결혼한 이래 남의 입에 오르내린 적이 없는 완벽한 처신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하루하루 판에 박은 듯한 삶을 살고 있으며, 모든 일이 그녀의 존재 범위 밖에서 이루어지는 까닭에 정원수 .. 2011. 10. 21.
관점 혹은 가치관 며칠 전 이런 댓글을 받았습니다. "선생님의 글을 읽었을 뿐인데, 선생님께서 어떤 가치관을 가지신 교장선생님이신지 알 듯하고 어떤 마음과 몸짓으로 한평생 교단에 서셨는지 짐작할 수 있을 듯하다고 감히 말씀드리면서 선생님 블로그의 팬이 되고 싶습니다." 독자들로부터 더러 이런 댓글을 받는 '영광으로'(더 멋진 단어는 없겠지요?) 이 블로그를 들여다보며 지냅니다. '블로그를 들여다보며 지낸다'는 건 지금으로서는 소중한 일입니다. 다른 특별한 일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 "어떤 가치관을 가지신 교장선생님이신지 알 듯하고~." '가치관(價値觀)'이란 단어가 내게 어울리지 않는다면 '관점(觀點)' 정도는 괜찮을 것 같습니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그런 '관점'이야 나에게도 몇 가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정치가.. 2011. 9. 19.
내가 사랑하는 화가 누가 나에게 어떤 그림을 좋아하느냐고 물으면, 나는 이 그림을 좋아한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이 그림은 내가 하루도 빠짐없이 드나드는,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현관에 걸려 있습니다. "당신은 어떤 그림을 좋아합니까?" 그렇게 질문했을 때 내가 만약 초등학생처럼 "밀레의 만종입니다." 혹은 "모나리자요." 하거나, 피카소나 고흐의 어떤 작품을 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실없는 사람' 혹은 '그래? 잘났네' 그런 취급을 받기가 일쑤일 것입니다. '만종'이나 '모나리자'는 본 적도 없을 뿐만 아니라 고흐, 피카소의 그림은 전시회에서 몇 번 '쏜살같이' 지나가며 일별했을 뿐이므로 좋아하고말고를 따질 수도 없습니다. 사실은 "그림" 하면 당장 떠오르는 화가가 이중섭, 모딜리아니입니다. 이중섭은 서귀포에만 가면 '이.. 2011. 8. 24.
사랑하는 것과 사랑받지 못하는 것 나는 마침내 가시 철망들을 통과하여 폐허 사이에 와 있었다. 그리하여, 평생에 한두 번밖에 나타나지 않는, 그리고 그 이후로 그 삶은 한껏 은혜 입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게 해 주는, 그러한 장엄한 12월의 햇빛 아래서, 나는 정확히, 내가 찾으러 왔던 것, 그 시대와 그 상황에도 불구하고 진정으로 나에게만 제공된 것, 그 버려진 자연 속에서 정말로 오직 내게만 제공된 것을 발견하였다. 올리브나무들로 가득 뒤덮인 공회소로부터 차츰 저 아래 마을을 볼 수 있었다. 마을로부터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투명한 대기 속에서 몇 웅큼의 연기가 솟아올랐다. 쉬임없이 쏟아지는 눈부신 차가운 햇빛 아래 숨이 막힌 듯, 바다 역시 고요했다. 세누아로부터 오는 먼 닭 울음 소리만이 오래 가지 못하는 낮의 영광을 축하.. 2011. 5. 11.
박두규 「자취를 느끼다」 자취를 느끼다 박 두 규 숲에 드니 온통 그대의 자취로 가득합니다. 아직 안개가 가시지 않은 편백나무 아래서 입 맞추고 함박꽃 활짝 핀 관목 숲 좁은 길모퉁이에서 그대를 수없이 안았습니다. 부드러운 가슴의 박동 소리에 놀라 새들이 날아오르고 숲을 뚫고 쏟아지는 빗살무늬 화살을 온몸에 받았습니다. 의식을 잃고 싶은 마음으로 더욱 또렷해지는 그대. 보면 볼수록 들으면 들을수록 세상은 온통 그대의 자취로 가득한데 나는 왜 그대 얼굴도 떠올릴 수 없는 것입니까. 나는 왜 아직도 그대의 모습조차 그릴 수 없는 것입니까. ────────────── 박두규 1956년 전북 임실 출생. 1985년 『남민시南民詩』 창립동인으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 『사과꽃 편지』 『당몰샘』 『숲에 들다』 등. 『現代文學』 2010년 9.. 2011. 5. 1.
윤석산 「벚꽃잎 같은 연분홍 아라베스크 자세로 서는 시를 위하여」 벚꽃잎 같은 연분홍 아라베스크 자세로 서는 시를 위하여 -환지통幻肢痛·6 윤석산 제가 지금 쓰고 싶은 시는 '사랑'이라고 쓰면 그 모습이 더욱 발그스름해지면서 어감語感이 탱글탱글한, 그리고 아라베스크 자세로 서는 까르르 웃으며 무수한 빛살이 쏟아지는 청보리밭이랑 사이로 도망가는 그래서 지난 사월 한 잎 한 잎 지던 벚꽃이었다가 분홍 나비가 되어 일제히 날아오르는 그런 시인데 사지四肢를 절단한 후 뇌신경세포의 착각으로 없는 팔다리가 있는 것처럼 아프다는 테마로 연작시를 쓰기 때문인지 창문 밖 아파트 공터에서 해바라기를 하는 옆 동 영감 이야기를 쓰고 싶어 원고마감 기일을 넘기고도 이렇게 낑낑대고 있습니다. * 그 영감님, 지난여름 뇌수술腦手術을 받은 뒤 간병看病교육을 받으러 간 아내를 생각하며 혼자 점심을.. 2010. 12. 8.
고백 고백(告白) 퇴임 교장 서운(瑞雲) 선생이 며칠에 한 번씩 보내주는 메일을 보면, 가령 일본의 희한한 분재, 중국의 기기묘묘한 풍광, 늙은이들이 힘써야 할 섭생 등등 한가한 사람이면 눈요기가 될 만한 것들이 많습니다. 그 자료들을 보면서, 이런 걸 어디서 어떻게 구하는지, 저작권에 걸리는 건 아닌.. 2010. 6. 2.
외손자 선중이 Ⅲ 월요일 오전에 다시 병원에 가보기로 했습니다. 5월 들어서 메스껍고 어지러운 느낌이 들 때가 있더니 그 증상이 차츰 심해지는 것 같아서 예약을 했습니다. 어지럽고 메스꺼운 느낌이 지나가면 몸이 파김치가 되어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입원을 하지 않아도 되고, 그냥 약만 조금 바꾸면 된다는 진단이 나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외손자가 저녁에 전화를 하더니 다짜고짜 "몸은 어때요?" 하고 물었습니다. 전화를 끊을 때도 그랬습니다. "건강하셔야 해요?" 언제부턴가 그 아이의 인사는 그렇게 됐습니다. "건강하셔야 해요?" 아니면 "건강하세요." 지난 4월 11일, 제 외삼촌 결혼식날에도 그 애는 저만 따라다녔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그 당시에도 제 몸은 그런 큰일을 치루기에는 벅찼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합니까. 제.. 2010. 5. 30.
사랑, 그와 그녀의 사랑… 사랑, 그와 그녀의 사랑, 그게 가버렸다면, 그것들은 어디로 갔지? - 현대문학 2008년 2월호 189, 정현종 「파블로 네루다 시집 『질문의 책』 읽기」 22. 2010. 4. 8.
김 명 리 「선물」 선 물1 김 명 리 우리가 헤어지던 그해 겨울 당신은 내게 향로를 주었다 손아귀로 꼭 한 줌, 저녁 숲에 차오르는 이내를 닮았다 했으나 뚜껑 여닫을 때마다 바스락거린다 봄 강 물마루의 얼음장 풀리는 소리가 난다 보름사리로 밀리며 쓸리는 달빛, 물빛 유채꽃 불씨들이 한줄금 연무로 날아오르고 물그림자 흔들흔들 밤이면 스모그빛으로 소용돌이치는 달의 행로를 비추지만 모로 눕히면 허공이 쏟아지는 박산향로博山香爐다 뉘 무덤에 물리는 젖 내음인지 어느 곳도 향하고 있지 않은 무하향無何鄕 청명한 밤에는 먼 절 사미니의 목탁 내리는 소리 천지간 흩날리는 연분홍 털오라기들로만 당신이 두세두세 내 흉금에 꿰매놓은 박산향로다 --------------------------------------------------------.. 2010. 3. 3.
문정희 「겨울 사랑」 겨울 사랑 문정희 눈송이처럼 너에게 가고 싶다 머뭇거리지 말고 서성대지 말고 숨기지 말고 그냥 네 하얀 생애 속에 뛰어들어 따스한 겨울이 되고 싶다 천년 백설이 되고 싶다 서울아산병원 사보(社報)에서 읽었습니다. 병원 뒤편 한강 그 하늘 위로 다시 이 해의 눈이 내릴 때 나는 중환자실에 갇혀 있었습니다. 멀쩡한(?) 사람들은 하루만에 벗어나는 그곳에서 3박4일을 지내며 평생을 아이들처럼 깊이 없이 살아온 자신을 그 풍경에 비추어 보았습니다. 그러자 그 눈송이들이 이번에는 마치 아이들처럼 내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 큰 건물 앞으로는 자동차와 사람들이 쉴새없이 드나듭니다. 어떤 '행복한' 사람은 담배까지 피우며 걸어다닙니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그 모습들은 무성영화 같습니다. 풍경에서 그리움이 피어오르기로.. 2010. 2. 8.
파스테르나크 『닥터 지바고』Ⅲ B. 파스테르나크 『닥터 지바고』 김재경 옮김, 혜원출판사, 2007 2010. 1.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