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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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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수 「눈 내린 아침」 눈 내린 아침 조영수 지워졌다 깨끗한그리운기다리던보고싶은 솜털같은백설기같은솜사탕같은 꾸밈말들 다 지워지고 와!만 남았다. 미래동시모임동인지 《지구를 꺼 볼까》(2020, 아동문예) 어제는 정말 많이도 내렸습니다. 오후에는 구름처럼 일어나서 몇 굽이 산자락을 가볍게 넘어가 버리는 무서운 눈보라도 보았습니다. 다 요절낼 것 같았는데...... 시인은 새벽에 일어나 세상을 덮은 눈을 보신 것 같습니다. 깨끗한 그리운 기다리던 보고 싶은 솜털 같은 백설기 같은 솜사탕 같은...... 그런 말 다 지워(치워) 버리고 와! 하던 기억이 오롯합니다. 나도 누구에게 그런 사람이었더라면 좋았을 것입니다. 첫새벽 저 눈 같은 사람...... 2021. 1. 19.
눈에 갇히지 않으려고 애쓰기 지난 일요일, 새벽까지는 눈이 내리지 않았습니다. "눈이 와?" "오긴 뭐가 와?" 아내가 퉁명스럽게 대답합니다. 이런..... 일기예보는 분명했으므로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전날 일찌감치 저곳에서 나왔기 때문에 눈이 내리지 않는 건, 눈이 내릴 거라면서 얼른 나가자고 재촉한 내 촌스러운 입장을 난처하게 했습니다. 아침이 되자 마침내(!) 눈이 내렸습니다. '보라고! 창밖 좀 내다보라고!' 나는 말없이, 소리없이 외쳤습니다. 그렇게만 해도 충분했습니다. 아내는 더 이상 퉁명스러울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게다가 눈은 한꺼번에 내렸습니다. 그러자 마음이 더 더 더 풀렸습니다. "서둘러 떠나시기를 잘 하셨습니다. 저도 서둘러 들어오기를 잘했습니다." 저곳으로 들어간 친구가 저곳으로부터 탈출해온 나에게 저.. 2020. 12. 15.
눈(혹은 남자가 보는 남자) 2020. 3. 25.
황인숙 「한밤의 일을 누가 알겠어요」 한밤의 일을 누가 알겠어요 황인숙 어젯밤 눈 온 거 알아요? 어머, 그랬어요? 아무도 모르더라 토요일 밤인 데다 날도 추운데 누가 다니겠어요 저도 어제는 일찍 들어갔어요 한밤의 일을 누가 알겠어? 우리나 알지 4월인데 눈이 왔네요 처음에는 뭐가 얼굴에 톡 떨어져서 비가 오나 하고 가슴 철렁했는데, 싸락눈이더라구 자정 지나서는 송이송이 커지는 거야 아, 다행이네요 그러게, 비보다는 눈이 낫지 동자동 수녀원 대문 앞 긴 계단 고양이 밥을 놓는 실외기 아래 밥그릇 주위에 졸리팜 곽 네 개 모두 뜯긴 채 흩어져 있었지 빠닥빠닥 블리스터들도 빠짐없이 비어 있었지 졸리팜 가루 같은 싸락눈 쏟아지던 밤이었지 ―――――――――――――――――――――――――――――――――――――――― 황인숙 1958년 서울 출생. 198.. 2018. 12. 15.
김행숙 「작은 집」 작은 집 김행숙 리셋하자, 드디어 신이 결정을 내린 것이다. 신의 말에 순종하여 밤낮으로 흰 눈이 내리고, 흰 눈이 내리고, 흰 눈이 내려서…… 이 세상 모든 발자국을 싹 지웠네. 보기에 참 아름답구나. 그런데…… 신이란 작자가 말이지, 이 광활한 세계를 한눈에 둘러보느라 시야가 너무 넓어지고 멀어진 나머지 조그만 집 한 채를 자기 속눈썹 한 올처럼 보지 못했다지 뭔가. 옛날 옛적에 잃어버린 꽃신 한 짝과 같은 그 집에는 늙은 여자 혼자 살고 있었다네. 어느덧 늙어서 동작도 굼뜨고 눈도 침침하고 기억하는 것도 점점 줄어들어 인생이 한 줌의 보리쌀 같았대. 늙은 여자 한 명이 날마다 불을 지피는 세계가 있고, 마침내 늙은 여자 한 명이 최후의 불꽃을 꺼뜨린 세계가 있어서, 신이 견주어본다면 이 두 개의 시.. 2018. 3. 23.
눈 온 날 아침 마침내 2017년의 눈까지 내렸다. 첫새벽에 내려서 눈이 내린 것도 모르고 있다가 날이 다 밝은 뒤 창문 너머 눈 풍경을 보았고 늦잠을 잔 것이 아닌데도 무안한 느낌이었다. 너무 멀어진 날들의 겨울방학과 방학책들이 생각났다. 내가 아이들을 가르칠 때 본 방학책이었는지,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 받은 방학책이었는지, 이젠 그것조차 구분하지 못한다. 그런데도 눈이 내려 저렇게 쌓였다. 그새 눈이 내려 저렇게 쌓이다니……. 이렇게 내린 눈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아이들을 가르치며 지낸 나는 눈이 내렸다고 이러고 있지만 눈 같은 건 내려도 그만 내리지 않아도 그만인 채 지내고 있을까? 2017. 11. 25.
내가 사는 곳 북쪽 어디에는 진눈깨비가 내렸다고 했다. ― 허연(시), 「시월」(『현대문학』 2017년 1월호) 중에서. 그날 저녁, 내가 살펴본 블로그에서는 아무도 눈 내린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나는 마침내 멀고 외로운 곳에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되었다. 2017. 2. 11.
아이들의 눈을 들여다보라(2016.1.25) "아이들의 눈을 들여다보며 지낸 세월은 즐겁고 행복했다." 사십여 년의 교직생활을 그렇게 요약하곤 한다. 아이들의 눈! 그 눈을 들여다볼 수 있는 것은 교원의 특권이므로 그들이 부르면 열 일 제쳐놓고 몸을 돌려 그 눈을 바라보라는 뜻으로 전 교직원에게 회전의자를 선물하고 학교를 나왔다. 회전의자! 그게 그 세월로써 도출한 '교육의 결론'이 된 것이다. 세상에서 속일 수 없는 유일한 대상이 아이들의 눈이라는 걸 발견했다. 저것들이 뭘 알겠나 싶지만 그 눈은 우리가 그들을 형식적으로 대하는지 따뜻한 마음으로 대하는지 당장 간파해낸다. 교육을 내세우면서도 그들을 대하는 실제적 이유는 다를 수 있지만(봉급을 받으려는 것이 가장 우세하고 합당할는지는 모르겠다), 아이들은 우리에게서 오직 사랑을 찾고 확인하려는 경.. 2016. 1. 24.
「풍설야귀인風雪夜歸人」 풍설야귀인風雪夜歸人* 정재학 바람 소리가 백색의 글자들로 내리는 밤 한쪽 눈이 먼 화가의 눈보라로 지어진 집으로 가자 목쉰 개 짖는 소리 들리고 나귀도 없이 터벅터벅 푸너리 같은 바람을 지나 거무장단 같은 눈발을 뚫고 바람의 반사음과 묵향이 경계 없이 흔들리며 번지는 밤 * 조.. 2015. 12. 30.
이태수 「눈(雪)」 2013.12.26. 영동사거리 눈(雪) 이태수 눈은 하늘이 내리는 게 아니라 침묵의 한가운데서 미끄러져 내리는 것 같다 스스로 그 희디흰 결을 따라 땅으로 내려온다 새들이 그 눈부신 살결에 이따금 희디흰 노래 소리를 끼얹는다 신기하게도 새들의 노래는 마치 침묵이 남은 소리들을 흔들어 떨치듯이 함께 빚어내는 운율 같다 침묵에 바치는 성스러운 기도 소리 같다 사람들이 몇몇 그 풍경 속에 들어 자신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 먼 데를 바라본다 그 시간의 갈라진 틈으로 불쑥 빠져 나온 듯한 아이들이 몇몇 눈송이를 뭉쳐 서로에게 던져 대고 있다 하지만 눈에 점령당한 한동안은 사람들의 말도 침묵의 눈으로 뒤덮이는 것 같다 아마도 눈은 눈에 보이는 침묵, 세상도 한동안 그 성스러운 가장자리가 되는 것만 같다 『현대문학』.. 2014. 12. 10.
「싸락눈 내리어 눈썹 때리니」&「설중여인도(雪中女人圖)」 재작년 2월 둘째 주 어느 날, 블로그 『강변 이야기』의 작품 싸락눈 내리어 눈썹 때리니 싸락눈 내리어 눈썹 때리니 그 암무당 손때 묻은 징채 보는 것 같군. 그 징과 징채 들고 가던 아홉 살 아이…… 암무당의 개와 함께 누릉지에 취직했던 눈썹만이 역력하던 그 하인 아이 보는 것 같군. 보는 것 같군. 내가 삼백 원짜리 시간 강사에도 목이 쉬어 인제는 작파할까 망설이고 있는 날에 싸락눈 내리어 눈썹 때리니……. 『徐廷柱詩選』민음사 세계시인선 ⑫, 1974, 111. 설중여인도(雪中女人圖) 김원길 저 눈 좀 보아, 저기 자욱하게 쏟아지는 눈송이 좀 보아 얼어 붙은 나룻가의 눈 쓴 소나무와 높이 솟은 미루나무 늘어선 길을 눈 속에 가고 있는 여잘 좀 보아. 내리는 눈발 속에 소복(素服)한 여인의 뺨이 보이네.. 2013. 12. 1.
교황의 눈, 나의 눈 성직자들의 흉상이나 초상을 이야기하려니까 두렵습니다. 주제넘은 일이기도 하거니와 종교에 관한 언급이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저 인상적인 점만 말한다면, 「교황 피우스 2세 흉상」은 웬지 무섭습니다. 멋진 의복이나 모자는 돈만 많으면 갖출 수 있지만 저 근엄한 표정, 눈초리가 그렇습니다. 이 교황은 십자군 전쟁을 일으켜 유럽을 통일하려고 했다는데, 그래서였는지 르네상스 시대에 이탈리아 통일의 야망을 품었던 군주 체사레 보르자가 그의 저택에 이 흉상을 보관했었답니다. 체사레 보르자는 아버지가 교황이었고, 대주교로 출발했는데, 그를 모델로 하여 『군주론』을 쓴 마키아벨리는, 두려움과 증오의 대상이 된 그를 드러내놓고 존경했답니다. 내가 그의 책은 많이 읽었으면서도 별로 좋아하지는 않는, 시오노.. 2013. 4.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