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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향수8

냄새를 분류해서 보관한 거대한 집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 《향수》(열린책들 1991)에서 이 부분을 찾으려고 또 읽었습니다. 어디 중간쯤에 나오는 이야기인가 생각했는데 다행히 62쪽쯤에 나왔습니다. 아예 여기에 필사해 놓기로 했습니다. 그날 밤 그는 처음에는 깬 상태로, 그 후에는 꿈속에서 자신의 기억에 보관된 거대한 냄새의 폐허 속을 뒤지고 다녔다. 그는 수백만 가지의 냄새를 검사해서 체계적인 질서에 따라 배열했다. 좋은 냄새와 나쁜 냄새, 섬세한 냄새와 조잡한 냄새, 악취와 향기를 따로따로 분류했다. 그다음 일주일 동안 그의 분류는 점점 더 자세해져서 냄새의 목록은 더 풍부하게 세분화되었고 그 체계가 더욱 뚜렷해졌다. 이제 곧 처음에 계획한 대로 냄새의 건물을 짓는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집과 담, 계단과 탑, 지하실과 방, 감추.. 2021. 6. 24.
바다 냄새 그는 어머니가 단두대에서 참수된 그레브 광장에 갈 때도 있었다. 그 광장은 마치 커다란 혓바닥처럼 강 쪽으로 쑥 들어가 있었다. 그는 광장에 눕거나 강가로 가 보거나 혹은 기둥에 매여 있는 배에 다가가서 석탄이나 곡식, 풀과 물에 젖은 밧줄 냄새를 맡아보기도 했다. 그러면 서쪽으로 강을 가로막고 있는 이 도시의 숲 속 길을 통해 바람이 불어오기도 했다. 바람은 시골 냄새, 뇌일리 부근 초원의 냄새, 생 제르맹과 베르사이유 궁전 사이에 있는 숲의 냄새, 루앙이나 카엥처럼 멀리 떨어져 있는 도시의 냄새를 실어 왔다. 가끔 바다 냄새까지도 실어 오는 경우가 있었다. 바다에서는 물과 소금, 그리고 차가운 햇살이 묻어 있는 돛단배 냄새가 났다. 바다 냄새는 단순하면서도 하나의 거대하고 독특한 냄새였기 때문에 그르.. 2017. 9. 5.
언덕 위의 집 '어떤 가족이 살고 있을까?' 이것이 향수(鄕愁)라면 이런 향수를 느끼게 하며 '누군가'의 기억 속에 남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2016. 5. 27.
힘겨웠던 설득 힘겨웠던 설득 2015.1.1.14:02 Ⅰ 권력이나 지위, 돈, 지식 같은 걸 가지고 있으면 영향력 있는 말을 하기가 수월한 것 같습니다. 일부러 애쓰지 않아도 하는 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가게 되고, 특별히 다듬지 않은 말을 해도 듣는 쪽에서 스스로 좋은 뜻으로 해석하여 의미를 찾으려고 할 수도 .. 2015. 11. 8.
2015 가을엽서 아무도 보이지 않는 가을강변이 향수를 불러옵니다. '강변'은 끝없는 노스탤지어로 남을 것입니다. 원두막에서 가을바람을 맞고 있는 옥수수는 올해도 영글어서 어김없음에 위안을 느낍니다. 여름하늘은 저렇지 않았습니다. 구름은 우리의 복잡한 사정도 다 살펴가며 흘러가다가 갑자기 바람이 스산해지고 순식간에 2016년이 올 것입니다. 기한을 정해 놓은 것처럼 초조해집니다. 얼마 되지도 않는 서장의 책들은 줄어들지 않고 있습니다. 2015. 9. 13.
향수(鄕愁) 시간이 지나면서 이젠 별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들까지 향수를 불러일으킵니다. '이래도? 이래도 네가 별것 아니라고 여길 테냐?' 그렇게 나를 마음껏 조롱하기라도 할 것처럼. 그 별것 아닌 것 중의 한 가지가 예전에 살던 곳에 대한 기억입니다. 전날 저녁 쎌윈 부인은 우리에게 곁채의 이층에 있는 방을 보여주었다. 가구들은 좀 별스러웠지만, 그것만 빼면 아주 훌륭하고 큰 방이었다. 그 방에서 앞으로 몇달간 지낼 생각을 하니 우리는 금세 기분에 좋아졌다. 커다란 창문을 통해 정원과 공원, 하늘 위에 수평으로 길게 펼쳐진 구름이 한눈에 들어왔는데, 이런 전망은 실내장식을 보상해주고도 남을 만큼 멋졌으니 말이다. 눈길을 그저 창 쪽으로 돌리기만 해도 등뒤의 모든 것들을 순식간에 잊을 수 있었다. 며칠 전에는 W.. 2012. 6. 13.
책 냄새 '수석연구위원'이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드나들고 있는 한국교과서연구재단은, 건물 5층에 이사장과 사무국장, 과장 등의 직원이 업무를 보고 있고, 4층은 '교과서정보관'입니다. 그 정보관 한쪽에 사무실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 방을 드나들며 늘 이런 생각을 합니다. '내가 지금 재단의 목적에 기여하고 있는가?' 교과서정보관 문을 열고 들어서면 특유의 '냄새'가 납니다. 책들이 품어내는 그 냄새를 '향기(香氣)'라고 하고 싶지만 "책에서 나는 퀴퀴한 냄새를 향기라니……' 하고 터무니없다고 할 사람도 있을 것이므로 '냄새'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필자에게는 싱싱한 빵 냄새나 담배의 향기(47년을 피우고 "끊어버린" 아, 그 담배!), 혹은 커피향처럼 언제나 좋기만 하고 싫증이 나지를 않는 냄새지만, 사무실을 .. 2012. 4. 30.
향수(鄕愁) 「추억은 혼자 분주하다」(『강변이야기』, 2011.3.16. 내 마음의 풍경) 중에서 이 길로 가면 저 외딴집에 이르게 됩니까? "그렇지 않다"고 하셔도 괜찮습니다. 다른 곳에 이르른다 해도 그곳도 괜찮기 때문입니다. 아직 그리워할 사람이 없었을 때, 세상에 그리운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것조차 몰랐던, 좋은 시절에는, 저도 저 길을 다녔습니다. 어디로 간다 해도 좋은 길…… 이제 나이들어 그 길이 그립습니다. 그리워졌습니다. "해질녘/강가에 서면/더욱 막막할 뿐//더욱 더 깊어질 뿐" 그렇지 않아도 이미 '나는 이제 막막하구나, 막막해졌구나, 점점 더 막막해지는구나' 싶었는데, 찬찬히 읽고, '막막함'에 대해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막막해지는 것이 아닌가 싶어집니다. 그 막막함이란 어.. 2011. 3.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