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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편지111

김행숙 「마지막 여관」 마지막 여관 김행숙 조금 전에 키를 반납하고 떠나는 손님을 봤는데 분명히, 당신은 그 손님과 짧은 작별 인사까지 나눴는데 당신은 빈방이 없다고 말합니다. 오늘은 더 이상 빈방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의 말은 이상하게 들립니다. 당신은 기껏해야 작은 여관의 문지기일 뿐인데, 세계의 주인장처럼 당신의 말은 몇 겹의 메아리를 두르고 파문처럼 퍼져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동심원 가운데 서 있으면 나도 나를 쫓아낼 것 같습니다. 그러면 한겨울 산속에서 길을 잃은 나무꾼 이야기 같은 게 자꾸 생각나고, 이야기는 이야기일 뿐인데, 왜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자랐을까? 왜 그런 이야기만 기억날까? 왜 그런 이야기에 도시빈민 출신의 내가 나오는 것일까? 깊은 산속에서 나는 간신히 여관 하나를 찾아냈습니다. 여.. 2020. 6. 20.
《다른 색들》Ⅱ 나는 왜 읽는가? 오르한 파묵 《다른 색들》 이난아 옮김, 민음사 2018 어떤 결핍감, 어떤 불충분함. 그러면 우리는 우리가 가진 용기를 내어 여행을 떠난다. 이것은 휘스레브와 쉬린이 사랑을 위해 떠난 여행과 비슷하다. 우리는 우리를 완성시킬 '타자'를 찾는다. 더 깊은 곳에 있는, 더 배후에 있는, 더 중심부에 있는 것을 향한 여행. 아주 먼 곳에 어떤 실제가 있다. 누군가가 이를 우리에게 말했고, 어딘가에서 들은 적이 있으며, 그것을 찾기 위해 길을 나선다. 문학이란 이 여행 이야기다. 나는 이 여행을 믿는다. 하지만 어디 먼 곳에 중심부가 있다고는 믿지 않는다. 이것을 불행이라고도, 낙관주의라고도 말할 수 있다. (......) '쉬린의 어리둥절함'이란 에세이에서 발견한 문장이다. 쉬린은 천하일색의 아르메니아 공주.. 2020. 6. 18.
언년이의 죽음 언년이가 죽었다는 건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물어보기도 그렇고 찾아가 볼 용기도 없지만 미심쩍은 점이 없지 않았다. 언년이를 괴롭혀오던 거시는 며칠 전 모조리 축출되었는데도 언년이가 죽었다? 그게 말이 되는가? 언년이네 아버지가 주변 사람들 말에 따라 작심하고 장날 그 핑크빛 회충약 1인분을 사다 먹였고, 언년이는 음식물 찌꺼기는 눈 닦고 봐도 보이지 않는, 순전히 하얀 거시만 소복하게 세 무더기나 쏟아냈다고 했다. 언년이가 쏟아냈다는 거시 세 무더기를 내가 직접 보았던가? 본 것 같다. 거시 무리가 서로 속으로 들어가려고 우글거리는 모습, 착하게 살아가는 척 위선을 떨다가 지옥 바닥에 떨어진 인간들이 벌거벗고 우글거리듯 혹은 수십 마리 뱀이 뒤엉켜 축구 공보다 더 크고 둥근 덩어리를 이룬 채 잠시도 .. 2020. 6. 16.
강성은 「스노볼」 스노볼 강성은 엄마 눈이 내려요 자꾸자꾸 내려요 매일매일 내려요 눈 쌓인 소나무 가지 위에 까마귀가 나무 아래 호랑나비와 장난 치는 고양이가 그대로 멈춰 있어요 누가 이곳에 온다면 차를 대접할 텐데 아무도 오지 않고 가끔 누가 우릴 엿보는 것 같아요 흰 눈 덮인 마을에 불을 지를까요 마을이 다 타버리기 전에 누가 달려와 불을 꺼줄지도 몰라요 겨울은 생각이 많은 시간이에요 생각이 저 눈을 내리게 해요 생각이 우릴 눈 속에 가두었어요 생각을 멈춰야 하는데 아무도 우릴 만나지 못할 거예요 여긴 어떤 슬픈 사람의 마음속인가요 ―――――――――――――――――――――――― 강성은 1973년 경북 의성 출생. 2005년 『문학동네』 등단. 시집 『구두를 신고 잠이 들었다』『단지 조금 이상한』. 아이들이 저승에 가서도.. 2020. 6. 11.
어떤 여성일까? 45초간 수많은 사람과 건물 들이 땅속으로 사라진, 오르한 파묵의 이스탄불 지진 이야기에서 다음과 같은 문장을 보았다. "삶의 가장 은밀하고 잔인한 규칙이, 벽이 붕괴되고 넘어져 내부가 보이는 집 안에 있는 물건들처럼 드러났던 것이다." ‘삶의 가장 은밀하고 잔인한 규칙’이란 어떤 것일까? 그러한 드러남은 짧고 강렬한 지진의 경우에 더 심한 것일까, 아니면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강력한 힘으로 전 세계를 짓눌러 미증유의 변화를 강제하고 있는 코로나 19와 같은 현상에서 더 심한 것일까? 코로나 19 바이러스는 그 모습을 보여주지도 않고 내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현실적인 두려움이 되고 있다. 백신은 아무리 조급해도 절차에 따라 개발된다는 뉴스를 보며 초조해지고, 시인들은 시(詩)는 백신 .. 2020. 6. 9.
오르한 파묵(에세이) 《다른 색들》Ⅰ 오르한 파묵 《다른 색들》 이난아 옮김, 민음사 2018 일요일 아침에 출근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겠지. 자전거 위에서 둑 아래로 흐르는 가을 시냇물을 내려다보며 내 소식을 기다리고 있는 가난한 서정시인 생각을 했고 무슨 다짐도 했었다. 오십 년..... 충분한 세월이 흘렀다.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열차는 당연한 것처럼 지금도 다니겠지? 그만 타겠다고 얘기하진 않았다. 그 말을 했어야 할까? 고속도로는 막히겠지? 그것도 확인해야 할까? 나는 무관심했다. 다가온 일들은 지나가면서 계약이나 했던 것처럼 세월도 데리고 갔다. 너무 멀리 너무 오래 너무 많이 잊어버렸다. 다짐, 길, 사람들, 일들…… 정리되지 않은 것들뿐이다. 멀리 와서 오래되어서 생각만으로도 지친다. 오르한 파묵의 에세이가 더 그렇게 .. 2020. 6. 7.
월명 「제망매가」 「제망매가」는 어느 한 부분이라도 잘못 이야기하면 혹 누이동생들에게 재수 없는 일이나 벌어지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렇지만 정말로 '생사의 길'이 재수에 달린 것일까. 내 마음은 최근 몇 년 사이에 마지막 고개를 넘은 느낌이었다. 얽히고설키어 살던 사람이 유명을 달리하니까 당장 하얗게 잊혔고 함께하던 시간들 중 몇 가지가 쓸쓸한 날에만 두어 장 사진처럼 떠오를 뿐이었다. H 씨는 가난한 초등교사였다가 공부를 더 하고 노력해서 저명한 교수가 되었고 매우 넓은 토지도 소유했으나 그만 암에 걸리고 말았다. 죽기 직전 몇 번이나 찾아와서 함께 시간을 보내곤 했는데, 그때마다 괜히 애를 썼다고 후회했다. 그러면서도 약값이 많이 든다고 가슴 아파했고, 돌아갈 때 작은 물건이라도 손에 쥐어주면 그걸 그렇게 고마워했.. 2020. 6. 5.
쓸데없는 기억 내 왼쪽 발등 바깥쪽 부분에는 대여섯 살 적의 한겨울, 꽁꽁 얼어붙은 논두렁에서 스케이트를 타다가 나보다 네 살이 더 많은 동네 형의 송곳에 찔려서 생긴 상처가 겨울 내내 아물지 않아서 생긴 검붉은 상처의 흔적이 남아 있다. 나는 살아오면서 그에게 단 한 번도 그 얘기를 꺼내지 않았는데 얼마 전에 그가 유명을 달리했다. 그는 나쁜 인간이 아니었고, 게다가 공교롭게도 나의 사촌 누나 한 명과 결혼까지 한 것이었다. 나는 나의 이 상처의 흔적에 대해 아무에게도 이야기한 적이 없고 마침내 이젠 이야기를 할 수도 없게 되었다. 그가 영영 죽어버렸기 때문에 이젠 그 흔적을 보여주며 얘기한다 해도 믿어줄 사람이 없게 된 것이다. 써먹을 수도 없는, 쓸데없는 기억이 된 것이다. 인공지능은 이미 저승으로 간 사람이 생.. 2020. 6. 2.
스티브 로페즈 《솔로이스트》 스티브 로페즈 《솔로이스트 The soloist》 박산호 옮김, 랜덤하우스코리아 2009 신문기자 스티브 로페즈가 혼잡한 거리 모퉁이의 베토벤 조각상 옆에서 쓰레기통을 뒤져 끄집어낸 듯한 낡은 바이올린으로 베토벤의 작품을 연주하는 흑인을 보았습니다. "소리가 근사한데요." "아, 고맙습니다." "농담 아니죠?" "난 음악가는 아니지만, 그래요, 정말 근사했어요." 그의 전 재산을 산더미처럼 실은 쇼핑카트 옆에서 그 흑인은 때가 꼬질꼬질한 옷을 입고 있었지만 그에게선 기품이 느껴졌습니다. 나다니엘 안소니 아이어스, 50세쯤의 그 흑인은 정신분열증 환자였고, 스키드 로 근처에서 가장 큰 빈민 구제 시설인 미드나이트 미션에 있다고 했지만 잠은 거리에서 자는 노숙자였습니다. 더구나 줄이 두 개밖에 없는 바이올린.. 2020. 5. 31.
2020 봄 저기 새로 돋은 나뭇잎들 좀 봐! 벌써 저렇게 활짝 폈네. 이제 어쩔 수 없지. 저걸 무슨 수로 막아. 그냥 두는 수밖에…… 2020. 4. 29.
나를 서럽게 하는 '코로나 19' 밖에 나가는 것이 특별한 일이 되었습니다. 엘리베이터 앞에 앙증맞은 여자애와 아름다운 '엄마'가 서 있었는데 내가 나타나자 엄마가 아이를 저쪽으로 감추었습니다. 그들이 올라가고 난 다음에 따로 탈까 하다가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겠나' 싶어서 뒤따라 타버렸습니다. 유치원생 아니면 초등학교 1학년쯤으로 보이는 그 여자애가 잠시를 참지 못하고 몸을 흔들어대다가 내가 있는 쪽으로 기우뚱하자 몇 번 주의를 주던 엄마가 그만 사정없이 '홱!' 잡아챘습니다. 내가 서 있는 쪽의 반대쪽으로 낚아챘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할 것이었습니다. 전철 노약자석에 앉았다가 노숙자 냄새 때문에 일어선 일이 있었습니다. 그 노숙자가 생각났습니다. 그 엄마가 밉지는 않았습니다. 텔레비전 화면에 비친 코로나 바이러스 사진(그림)은 어째.. 2020. 2. 27.
에밀 졸라 《목로주점 1》 에밀 졸라 《목로주점 1》 박명숙 옮김, 문학동네 2018 1 세탁부 제르베즈는 괴물 같은 모자 제조업자(말로만) 랑티에와 동거하면서 겨우 열네 살 때 클로드를 낳고 열여덟 살 때 에티엔을 낳았습니다. 그녀는 성장기에도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알코올 중독자인 아버지 마카르는 걸핏하면 발길질을 해댔습니다. 그녀는 "아름답고 용기 있는 여성"이었고 언젠가 그녀가 어려움에 처한다면 그녀는 자신을 믿어도 좋을 여자였습니다. 정부 랑티에는 그런 제르베즈의 속옷까지 전당포에 잡혀놓고 창녀 아델의 품으로 달려갑니다. 2 그녀에게 함석공 쿠포가 접근합니다. 말쑥한 외모에 새하얀 이를 드러내고 활짝 웃는 모습이 매력적인 남자였습니다. 낙천적인 성격의 그는 미래를 걱정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 쿠포가 제르베즈의 옅은 장밋빛.. 2019. 7.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