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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이우환21

자연에 대한 경외심 '나'는 일본에서 활동 중인 이우환 화백이고 '루트'와 '에스라'는 그의 친구들이다. 루트가 말했다. "당시 사람들은 거인이었던 걸까?" 나는 조금 생각한 뒤 말했다. "그럴 리는 없지. 다만 지금 사람들과는 달리 그들은 조금 더 자연의 에너지, 그 힘과 연이어 있는 존재였을 거라고 생각해." "자연의 힘?" "우리처럼 고립된 개인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삼라만상과 이어진 공동체의 힘이라고나 할까, 자연에 대한 경외심이랄까, 신에 대한 신앙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 에스라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러니까 괴력이 작용했다는 뜻이군." "현대인은 공통된 정보와는 연결되어 있지만, 생각도 신체도 외부와 단절되어 있어서 자기 자신의 힘밖에 없는 게지." "엄청난 힘을 잃고 말았네." 이우환의 에세이 「라.. 2024. 4. 18.
은혜를 원수로 갚아버리기 교사들의 승진 길은 교감이 되는 길밖에 없습니다. 더러 시험을 봐서 장학사나 교육연구사가 되기도 하는데 그건 승진이 아니고 직을 바꾸는 '전직'입니다. 장학사를 밤낮없이 '죽어라!' 하고 나서 교감이 되어 학교로 돌아가게 되면 이번에도 승진이 아니고 전직입니다. 1980~1990년대에도 승진하기가 꽤나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경력 점수를 다 채운 교사들 중에는 주임(지금의 부장) 점수를 채우려고 혹은 근무성적을 잘 받으려고 교감 교장에게 쩔쩔매면서 살기도 했는데, 나를 찾아오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답설재 선생님~ 저는 그런 점수는 다 채웠는데 연구 점수가 모자랍니다. 교육연구라면 답설재 선생님이 전국적으로 이름이 나 있어서 어떻게 좀 선처를 구하려고 이렇게 찾아왔으니 부디 물리치지 마시고 잘 .. 2022. 10. 1.
이우환 《여백의 예술》 이우환 《여백의 예술》 김춘미 옮김, 현대문학 2014 이우환의 책은 네 권째이다. 《시간의 여울》(1994)은 이슬·수정 같은 에세이들이었고 《멈춰 서서》(2004)는 바로 그 느낌의 시집, 《양의의 예술》(2014, 심은록 엮음)은 그의 예술에 관한 대담집이었다. 그의 예술세계가 겨울 햇살 같다고 생각되었다. 이 책 《여백의 예술》과 함께 네 권을 따로 분류하지 않고 한 군데 모아놓고 있었는데 《여백의 예술》은 읽지 않은 채였다. 이건 분명히 개론서가 아닐까 싶어서 선뜻 읽을 용기를 내지 못했다. 이번에 비로소 이 책을 읽으며 과연 이우환다워서 가슴이 울렁거렸는데 그것은 여섯 장(章) 중에서 첫째 장에서였다. · 여백의 예술 · 무한에 대해 · 중간자 · ...... 이우환은 어려운 것을 쉽게 이야기.. 2022. 9. 27.
빠다샹젱(八大山人) 〈목련도〉 빠다샹젱(八大山人)의 〈목련도〉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등심을 찡하게 달려가는 전율을 느끼게 된다. 혼이 뒤흔들어진다. 화면 바닥으로부터 헤아릴 수 없는 전파가 보는 자에게 잇따라 밀려온다. 보고 있다기보다 어느 틈엔지 저쪽이 쏘아보고 있다. 외면하는 것도 눈을 내리까는 것도 허용되지 않는다. 이 기백에 찬 눈초리에 홀리고 있는 사이에 말할 수 없는 깊은 비애에 가까운 투명감이 온몸 가득 퍼져나간다. 일상의 진흙 밭에서 뭔가 숭고하고 아득한 세계로 떠올려지는 것 같다. 이우환의 에세이 '여러 작가들' 중 '빠다샹젱(八大山人)의 〈목련도〉에 부쳐' 첫머리(이우환 《여백의 예술》현대문학 2014)에서 이 글을 읽다가 중단하고 인터넷에 들어가 보았다. 이우환의 설명 중에서 두 군데를 옮겨 써 두고 싶었다... 2022. 9. 23.
마티스 〈댄스〉 학교 다닐 때 미술 교과서에서 본 듯도 합니다. 초등학교 교사 생활을 할 때는 교과서에서 봤고 그 사진이 아주 작았다고 기억하지만 불분명합니다. 교육부 교육과정정책과장을 할 때는 여러 번 봤습니다. 중고등학교 미술 검정 교과서 발행 허가를 전결하며 '여기도 있네' '이 책에도 있네' 했습니다. 오래 자세히 들여다본 적은 없습니다. 잠시 '이런 그림이야 아이디어만 가지면 웬만한 사람은 그릴 수 있는 그림이지 않아?' '마티스가 그리지 않았다면 분명 다른 누군가가 그렸겠지?' 했을 뿐이었습니다. 나에게 마티스는 그런 화가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오늘, 이우환 선생의 에세이를 읽고 아득함을 느꼈습니다. 내가 예술에 대해, 그림에 대해, 화가에 대해 무엇을 알겠습니까? 사실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나는 최근에.. 2022. 9. 12.
혜가단비도(慧可斷臂圖) 이우환의 에세이*를 읽다가 인터넷에서 그림을 찾아보았다. 그림 설명은 셋슈가 그린 「추동산수도秋冬山水圖」의 「겨울 그림」, 「혜가단비도(慧可斷臂圖)」, 「마스다 가네다카상(益田兼堯像)」 세 가지였는데, 두 번째의 「혜가단비도(慧可斷臂圖)」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그림 설명은 다 옮길 수가 없어서 첫머리의 두 대문만 필사하였다. 기괴한 바위 굴에 함께 있는 두 인물의 극적인 신scene을 그린 작품인데, 보면 볼수록 범상치 않은 박력에 압도된다. 달마가 눈을 부릅뜨고 살벌한 암벽을 향해 앉아 있는 곳에, 혜가가 찾아와 왼팔을 베면서까지 제자로 받아달라며 간원하는 장면이다. "인도로부터 중국에 선종을 전했다는 달마가 있는 곳에, 후계자가 될 혜자가 입문하는 순간"(시마오 아라타)인 듯하다. 이 그림의 첫인상은.. 2021. 6. 17.
전문가 보일러가 이상했습니다. 방 1이 따뜻하면 방 2가 냉방이 되고, 그러다가 이번에는 방 2가 따뜻해지면 돌연 방 1이 냉방이 되었습니다. 방 1, 2가 골탕을 먹이자고 약속해놓고 번갈아가며 약을 올리는 것 같았습니다. 방 1, 2의 온도조절기를 동시에 켜놓고 약 한 달간 그런 현상을 겪었으므로 우리는 지칠 대로 지쳤습니다. 방 1에서 지내다가 2, 3일 후에는 방 2에서 지내야 하는 게 성가시고 한심했지만 그로 인한 스트레스도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기거하는 방은 딱 둘이지만 그런데도 우리는 정처 없는 떠돌이 생활을 하는 꼴이어서 오늘은 방 1에 이부자리를 마련하고 내일은 또 방 2에 이부자리를 펴면서 이 세상에 이렇게 사는 사람이 또 있을까 싶었습니다. 보일러 관계자들은 그럴 리 없다고 했습니다. 이곳.. 2021. 6. 15.
렘브란트의 자화상 나는 여행지에서 가끔 렘브란트의 자화상을 만나곤 한다. 특히 말년의 작품 앞에 서면 왠지 숙연해진다. 대체로 어두운 그림이지만 불가사의한 빛을 내뿜고 있다. 몇 겹에 걸쳐 붓을 칠한 어두운 배경에, 희미하게 떨리는 듯한 붓의 터치가 겹쳐진 붉은 갈색의 짙은 음영이 드리워진 주름진 얼굴이 떠 있다. 할 말을 잊고 체념한 듯한 표정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이 묻어난다. 그림을 볼 때마다 렘브란트라는 화가를 넘어서 인간 존재의 마음속 깊은 곳을 들여다보는 기분이 든다. 자세히 보면 곳곳에 다시 그렸거나 명료하지 않은 붓질이 눈에 띈다. 어쩌면 그림 밑바탕에는 다른 그림을 그렸다가 지운 흔적이 있는지도 모른다. 다빈치의 「모나리자」가 그랬듯이 아무리 그리고 그려도 뜻대로 되지 않아 중간에 붓을 놓은 것처럼 .. 2021. 4. 20.
'나를 잊는다'(物我) 연전에『소동파 평전』(왕수이자오)에서 제화시(題畵詩)에 대한 내용을 보았다. 평전을 쓴 왕수이자오는 소식(蘇軾)의 제화시 가운데에는 그의 고도의 예술적 표현력이 두드러진 것과 투철한 예술적 견해를 나타낸 것이 있다면서 후자의 예로 문동(文同)이 대나무를 그린 정황을 서술한 시를 보여주었다(203~204). 여가與可가 대나무를 그릴 때 대나무만 보고 사람을 보지 않는다. 어찌 사람만을 보지 않으리? 멍하니 자신의 존재조차 잊어버렸다. 그 몸이 대나무와 함께 동화되어 청신함이 무궁하게 솟아 나온다. 이제 장주莊周가 세상에 없으니 누가 이러한 정신 집중의 경지를 알리오. 與可畵竹時, 見竹不見人. 其獨不見人, 嗒然遺其身. 其身與竹畵, 無窮出淸新. 莊周世無有, 唯知此疑神. 이 글을 읽는 중에 이번에는 화가 이우환.. 2021. 4. 18.
「카라얀의 지휘」 젊은 시절의 그의 지휘를 비디오로 본 적이 있는데, 실로 시원시원하고 늠름한 몸짓이었다. 70년대 후반까지는 신체의 움직임도, 지휘봉을 휘두르는 방식도 활달하면서도 위엄이 있었다. 그런데 80년대 후반부터, 다리를 끄는 등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인지 신체의 움직임이 점점 적어지고 지휘봉을 휘두르는 횟수가 급격히 줄어갔다. 만년에는 휠체어에서 겨우 일어서서 지휘봉으로 그저 몇 번 공간을 날카롭게 찌르는가 싶더니, 공중을 나는 듯이 조용히 휘두르고는 지휘봉을 쥔 손을 들어 올린 채 멈추고, 왼손을 가슴에 대고 가만히 눈을 감는다. 이것은 지휘를 한다기보다, 거기에 울리고 있는 오케스트라를 듣고 있는 모습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도 멋지게 지휘를 하고 있는 듯이 보이니 놀랍다. 이우환(에세이)「카라얀의 .. 2020. 8. 19.
'열리는 회화'(이우환) 이우환의 저서(『멈춰서서』 『시간의 여울』 『여백의 예술』 『양의의 예술(대화록)』)를 보면서 그가 어떻게 그림을 그리고 조각을 하는지 짐작해보곤 하다가 월간 『현대문학』(2019.7)에서 그의 에세이 '열리는 회화'를 읽으며 가슴이 울렁거리는 느낌을 가졌다. 어느 부분을 옮겨써놓아서 상기하는 데 도움을 받을까 하다가 아예 사진을 찍어두었다. 2019. 7. 20.
책과 함께 있기 책과 함께 있기 라스코 동굴 벽화(부분) (…) 이렇게 많고 다양한 동물과 크고 작은 것이 섞여 있는 스케일의 그림을, 그것도 암흑 속에서 작은 등불 빛에만 의존하여 그렸다는 사실은 실로 믿기 어려운 위업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혼자가 아니라 몇 명의 사람이 오랜 시간에 걸쳐서 그.. 2018. 10.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