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러움1 외롭고 쓸쓸하면 마치 이제 모든 일이 내게 달린 것처럼, 정신을 약간만 집중하면 그간의 일 전체를 철회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고, 내가 원하기만 하면 안토니나 할머니가 예전처럼 칸토 가에서 살고 계실 듯했다. 우리에게 배달된 적십자 엽서에 따르면, 우리와 함께 영국으로 가기를 거부했던 할머니는 이른바 전쟁의 시작 직후에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한다. 하지만 내겐 할머니가 여전히 금붕어를 매일 부엌의 수도꼭지 아래에 놓고 씻기도 하고 날씨가 좋으면 창틀로 옮겨놓고 신선한 바람도 좀 쐬게 하면서 조심스럽게 돌보고 있을 것만 같았다. 한순간만 매우 집중하면, 수수께끼에 숨겨진 핵심 단어의 음절들을 조합해 내기만 하면 모든 것이 예전으로 되돌아갈 것만 같았다. W. G. 제발트 장편소설 《토성의 고리》에서 옮긴 문장입니다(창비.. 2022. 4. 11. 이전 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