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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노인24

그녀를 위한 눈물 우리가 점심을 먹으러 들어갔을 때는 좀 일러서 단 두 명이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모녀였고, 말이 없었고, 너무 가라앉은 분위기여서 한 번만 더 쳐다보고는 그만 봤습니다. 예사로운 장면이었다면 마음놓고 몇 번 더 살펴봤겠지요. 어머니는 많이 늙었고, 딸은 삼사십 대? 머리를 노랗게 물들였고 냉랭한 표정이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일어서서 나가면서도 그들 사이에는 단 한 마디 대화도 없었습니다. 딸이 계산을 하고 돌아서는 순간 바닥에 무거운 물건이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고, 두 명의 여 종업원이 비명을 지르며 달려갔습니다. 그런데도 딸과 어머니 소리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 장면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출입구와 홀 사이에 파티션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머니는 한참만에 일어나는 듯했습니다. "괜찮아요.. 2023. 9. 27.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에너지 늙는다는 건 무엇일까? 다시 직장을 구하거나 돈을 한 번 더 벌어보거나 다시 사람을 만나거나... 무엇을 새로 시작하거나 할 기회나 에너지가 소멸된다는 것이겠지? 그런 사람에게 뭘 달라고,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건 염치가 없고 도리가 아니고 예의가 아니고 있을 수 없는 일 아닌가? 전제가 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새로 시작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스스로 포기하거나 하는 사람은 게으르다느니 어떻다느니, 의례적인 헛소리를 하는 인간과는 일단 대화를 거부하고 싶다. 소설《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에서 본 장면이다. # 1 나를 바라보는 모리츠의 눈은 충혈되어 있었다. "너를 보내고 싶지 않구나, 스밀라." 모든 인생은 정화를 일으킬 수 있는 잠재력을 포함하고 있다. 모리츠는 그 기회를 잃어버렸다. 지금 의자에 .. 2023. 7. 30.
겨우 손목뼈에 서너 줄 금이 갔다는데 지난 2월 말에 나는 이런 글을 써놓았었다. * 겨우 손목뼈에 서너 줄 금이 갔다는데 겨우 그 정도였는데 내 생활은 변했다. 운전을 못한다. 해도 될 것 같긴 한데 돌발상황이 일어날까 봐 엄두가 안 난다. 식사를 어린애처럼 한다. 포크로 하고, 왼손을 하고, 오른손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여서 음식물을 찢거나 자를 수가 없다. 이것쯤이야 싶던 칼질도 왼손으로 하니까 차라리 아예 안 하는 게 낫다. 양식 먹을 일이 없으니 다행이다. 스파게티는 좋다. 왼손으로라도 돌돌 말면 된다. 워드를 못한다. 손목이 비틀어지면 무슨 큰일이나 난 것처럼 신호가 오니까 '독수리타법'을 쓴다. 글씨 쓰기도 거의 술 취한 사람 수준이다. 왼손으로 해놓은 어제의 메모를 오늘 알아볼 수가 없어서 화딱지가 난다. 이런 바보! 왼손으로 .. 2023. 4. 3.
노인의 시간 새벽에 쓸데없이 일찍 잠이 깨어 오랫동안 뒤척였다. 그 시간이 꽤 오래 흘러 마침내 일어날 수 있었다(잠시, 왜 눈을 떴느냐는, 늙었으면 죽어야지 왜 살아 있느냐는 구박을 받더라는 씁쓸한 우스개가 생각났다). 어제저녁에는 고요해서 책을 읽을 수도 있었는데 괜히 '적막하구나...' '적막하구나...' 하며 두어 시간이나 헛된 시간을 보냈고 마침내 잠들 수 있었다. 오늘은 또 그렇게 해서 일어난 새벽부터 이 저녁까지 뭘 했는지 뚜렷한 기억이 없다. 그런데도 또 저녁이 되었고 두어 시간 후에는 구처 없이 잠자리에 들어야 한다. 이 저녁에도 책을 읽으면 좋을 텐데 나는 적막하다고, 한탄할 일도 아닌 걸 가지고 한탄처럼 생각하며 어정대고 있다. TV만 켜놓지 않는다면 나의 세상은 사실은 늘 이렇게 적막할 수밖에 .. 2023. 3. 23.
나는 '꼰대'가 되어 살아가네 묻지도 않았는데 늘 먼저 '답'을 주려고 하고, 심지어 그 '답'조차 유효기간이 지났다면 어떨까요? 사람들은 그 사람을 피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묻지도 않은 답을 들을 시간도 없을뿐더러 그 답 속에 섞여 있을 자신에 관한 평가나 판단도 듣고 싶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자신의 구태의연한 사고방식을 타인에게 강요하거나, 나이가 어리거나 지위가 낮은 사람에게 설교를 늘어놓는 일명 '꼰대' 기질은 나이 드신 분에게서 강하게 나타납니다. 오래 일했고, 많이 경험했으니 안다고 생각하는 것도 나이만큼 많기 때문입니다. - 구범준 세바시 대표 PD 「나이 들수록 '?'가 필요해」(《○○○○○》2022.11.)에서. 사람들이 "꼰대" "꼰대" 해서 어렴풋이 나이 들어 망령이 나기 시작한 사람을 보고 그러는가 .. 2022. 11. 7.
노인들은 왜 조롱을 받을까? '노인들은 왜 세상 사람들로부터 조롱을 받을까?' 시몬 드 보부아르의 《노년》을 읽으며 신화에서는 어떻게 이야기되었을지 궁금했습니다(흔히 신화에서 근원을 찾지 않습니까?). 제우스를 찾아보았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신들과 인간들의 아버지라는 위상에 걸맞게, 제우스는 자기 아버지 크로노스의 시대를 지배했던 티탄족과의 초기 전투에서 승리해 권위를 얻었다. 크로노스는 자기의 모든 자식들을 삼켜버렸으나 제우스의 어머니 레아는 제우스를 돌과 바꿔서 그를 구했고, 제우스는 자기 아버지를 무너뜨렸다. 그는 메티스를 삼켜서 한 몸에 힘과 지혜를 지니게 되었다. 제우스의 실용적 능력은 유명했으며 전혀 틀림이 없었고, 그의 판결은 비평의 여지가 없었다. 호메로스는 제우스가 정의의 황금 저울을 든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다. .. 2022. 10. 10.
인생은, 두서없이 삭제되어 가는 기억 : 시몬 드 보부아르 《노년》 (역사 사회에서의 노년 ②) 시몬 드 보부아르 《노년》 홍상희·박혜영 옮김, 책세상 2002 아리스토텔레스의 노인 묘사도 못마땅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수긍해야만 할, 노인이 보기에 비참한 내용이지만 베게트에게서도 "종말의 비참한 쇠락을 통한 삶에 대한 비판"(보부아르)을 발견한다. 보부아르는 이렇게 썼다.(298~299) 〈승부의 끝 Fin de partie〉에 등장하는 노부부는 쓰레기통에서 쓰레기통으로 전전하며 지나간 행복과 사랑을 언급하다가 모든 사랑과 모든 행복을 규탄하기에 이른다. 〈마지막 영화 La Dernière〉와 〈아! 아름다운 날들이여! Ah! les beaux jours!〉에서 잔인하게 다루어지는 주제는 기억의 풍화 작용, 우리 뒤에 남은 우리의 모든 삶의 풍화 작용이다. 추억은 두서없이 삭제되고 파손된 채로 생소.. 2022. 10. 4.
걷기·오래살기 2016년 6월 15일, '파이낸셜뉴스'에서 「하루 15분 걷기 운동만 해도 수명 길어진다」는 기사를 봤습니다. '15분쯤이면 나도 가능하겠지?' 싶어서 기사를 읽고 댓글란으로 내려갔다가 놀라움과 함께 수치스러움을 느꼈습니다. '이렇게들 생각하는구나...' 나의 경우 삶의 용기 같은 것이 그런 수치스러움에게 갉아먹히게 되고 그건 예방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마음에 드는 댓글을 고른 것이 아니고 한 부분을 그대로 옮겼습니다. **은 닉을 감춘 것이고, 가령 1시간 전은 댓글 단 시각, ■은 댓글이 '좋다'고 한 사람(엄지를 위쪽으로 든 손), □은 아니라고 한 사람(엄지를 아래쪽으로 든 손)은 아니라고 한 사람 수입니다. ** 그래도 조금이라도 걸어 다니고 운동하는 노인네들은 그나마 나은 편이다. 맨날 술이나.. 2022. 2. 28.
"마음이 아파서 우야노~ 힐링하러 오이소~" 마트 네거리에 걸린 점집 안내 현수막 글귀가 마음을 끌었다. "마음이 아파서 우야노~ 힐링하러 오이소~" 대단한 걸 알려주거나 팔자를 고쳐주겠다고 하지 않았네? 저 사람들은 길흉화복을 마음대로 하는 사람들 아닌가? 겨우 힐링이나 해주겠다고? 생각하다가, 힐링이라도 확실하다면 큰 것이긴 하네, 하고 고쳐 생각했다. 요즘은 마음이 아프고 나을 기미는 전혀 없다. 마음이 아프다기보다는 우울하다. 코로나 블루 때문인가? 그렇긴 하지만 그것만도 아니다. 점집에 간다고 힐링이 될 것 같지도 않다. 점집에서 코로나의 특성을 알 것 같지도 않고, 당신도 곧 나이가 줄어들어 청장년 대열에 합류하게 됩니다, 해주지도 못할 것이어서 점집 연락처도 적어 오지 않았다. 나의 우울에는 몇 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보편적.. 2022. 1. 31.
나이든 사람들은 불쌍한가? 《죽음의 수용소에서(Man's Search for Meaning, 빅터 프랭클)》라는 책에서 세 토막의 글을 옮겨놓았습니다. 둘째 세째 토막만 옮겨쓰고 싶었으나 그렇게 하면 의미 파악에 지장이 있어서 첫째 토막까지 옮겨놓았는데 첫째 토막은 그 의미가 어렴풋해서 둘째 토막의 맥락이 연결되는 것만으로 넘길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적절하게 행동할 기회와 의미를 성취할 수 있는 잠재력은 실제로 우리 삶이 되돌이킬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에 영향을 받는다. 물론 잠재적 가능성 그 자체도 큰 영향을 받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 기회를 써버리자마자 그리고 잠재적인 의미를 실현시키자마자 단번에 모든 일을 해버린 것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을 과거 속으로 보내고, 그것은 그 속에서 안전하게 전달되고 보존.. 2021. 11. 14.
"나도 한때는 새것이었네" 모처럼 병원에 다녀왔습니다. 아침을 굶고 가서 채혈을 했고 러닝머신에 올라가서 걷고 뛰어야 하니까 빵과 커피로 아침을 때울까 싶어서 그걸 샀지만 내키지 않아서 차에 갖다 두고 네 가지 검사를 더 받았습니다. 모처럼이었으므로 그동안 변한 것도 있어서 질문을 해야 할 것도 있었습니다. 대부분 친절합니다. 그렇다고 "참 친절하시네요" 하면 의심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이 노인이 이렇게 말하는 이유가 뭐지?' 친절하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뭘 물으면 간단히 대답하면 될 걸 가지고 아예 미주알고주알 얘기하는 걸 보면 '노인이라고 이러는구나' 싶지만 끈기 있게 듣습니다. 그렇게 어린애에게 설명하듯 하는 사람에게 "다시 한 번 설명해 주세요" 하거나 "나는 이 병원 십삼 년째 드나듭니다"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2021. 7. 4.
엄연한 '노후' 1 날씨가 좀 풀렸다고 말합니다. 하나마나입니다. 정작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고, 이제 집에 들어가도 좋은 시간인지 모르겠다고 얘기하고 싶은 걸 감추고 있다는 걸 잘 압니다. 그렇긴 하지만 할아버지도 굳이 그걸 얘기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마나일 것입니다. 2 몰라서 그렇지 세상은 무저갱입니까? 정신을 바짝 차리려고 해도 금방금방 까무루해집니다. 그렇게 까무룩해져서 아래로, 그 아래로, 어디가 바닥인지도 모를 구렁텅이로 자꾸자꾸 내려갑니다. 많이 내려가면 정신을 차려봤자 다 올라오지도 못한 채 또 까무룩해집니다. 누가 먼저 떠나면 어떻게 하나, 그 생각을 자주 합니다. 남은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는 그 문제는, 생각은 자주 하지만 결론이 있을 것 같지가 않습니다. 얘.. 2018. 12.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