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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김언희 「삭제하시겠습니까?」
삭제하시겠습니까? 김언희 ......쪄 죽일 듯이 더운 날이었어, 언니, 피팔나무 그늘을 따라 걷고 있었어, 담장 위에서 힐끔힐끔 따라 걷던 원숭이가 일순 내 눈길을 낚아챘어, 언니, 적갈색 눈알로 나를 훑었어, 훑으면서 벗겼어, 나를, 바나나를 벗기듯이, 나는, 정수리부터 벗겨졌어, 언니, 활씬 벗겨졌어, 뼛속까지 벗겨졌어, 놈은, 수음을 하기 시작했어, 내 눈 속을 빤히 들여다보면서, 보란 듯이 나를, 따먹기 시작했어, 언니, 숨이 헉, 막히는 대낮에, 광장 한복판에, 나, 홀로 알몸이었어, 머리카락이 곤두서도록, 알몸이었어, 언니, 담벼락 그늘에 죽치고 앉았던 사내들이 누렇게 이빨들을 드러내며 웃었어, 눈 속의 원숭이 똥구멍, 졸밋거리는 똥구멍들을 감추지 않았어, 나는, .................
2022. 12. 8.
김언희 「여느 날, 여느 아침을」
여느 날, 여느 아침을 김언희 여느 날 여느 때의 아침을, 죽어서 맞는다는 거, 죽은 여자로서 맞는다는 거, 섹스와 끼니에서 해방된 여자로서, 모욕과 배신에서 해방된 여자로서, 지저분한 농담에서 해방된 여자로서 맞는다는 거, 어처구니없는 삶으로부터도, 어처구니없는 죽음으로부터도 해방된 여자로서 맞는다는 거, 오늘 하루를 살아 넘기지 않아도 된다는 거, 사랑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 사랑하기 위하여 이를 갈아 부치지 않아도 된다는 거, 칼을 삼키듯 말을 삼키지 않아도 된다는 거, 여느 날 여느 때의 아침을, 죽은 여자로서 맞는다는 거, 매 순간 소스라치지 않아도 매 순간 오싹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 칼질된 고깃덩어리처럼 거죽도 뼈마디도 없이 우둘우둘 떨어대지 않아도 된다는 거,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아침을..
2019. 9.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