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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세월의 끝에 이르면 하나의 이야기로 엮이기를 기대하며 쓰는 편지

김언희5

김언희 「삭제하시겠습니까?」 삭제하시겠습니까? 김언희 ......쪄 죽일 듯이 더운 날이었어, 언니, 피팔나무 그늘을 따라 걷고 있었어, 담장 위에서 힐끔힐끔 따라 걷던 원숭이가 일순 내 눈길을 낚아챘어, 언니, 적갈색 눈알로 나를 훑었어, 훑으면서 벗겼어, 나를, 바나나를 벗기듯이, 나는, 정수리부터 벗겨졌어, 언니, 활씬 벗겨졌어, 뼛속까지 벗겨졌어, 놈은, 수음을 하기 시작했어, 내 눈 속을 빤히 들여다보면서, 보란 듯이 나를, 따먹기 시작했어, 언니, 숨이 헉, 막히는 대낮에, 광장 한복판에, 나, 홀로 알몸이었어, 머리카락이 곤두서도록, 알몸이었어, 언니, 담벼락 그늘에 죽치고 앉았던 사내들이 누렇게 이빨들을 드러내며 웃었어, 눈 속의 원숭이 똥구멍, 졸밋거리는 똥구멍들을 감추지 않았어, 나는, ................. 2022. 12. 8.
김언희 「요즘 우울하십니까」 요즘 우울하십니까 김언희 요즘 우울하십니까? 돈 때문에 힘드십니까? 문제의 동영상을 보셨습니까? 그림의 떡이십니까? 원수가 부모로 보입니까? 방화범이 될까봐 두려우십니까? 더 많은 죄의식에 시달리고 싶으십니까? 어디서 죽은 사람의 발등을 밟게 될지 불안하십니까? 혼자 있어도 혼자 있는 게 아니십니까? 개나 소나 당신을 우습게 봅니까? 눈 밑이 실룩거리고 잇몸에서 고름이 흘러내리십니까? 밑구멍이나 귓구멍에서 연기가 흘러나오십니까? 말들이 상한 딸기처럼 문드러져 나오십니까? 양손에 떡이십니까? 건망증에 섬장증? 막막하고 갑갑하십니까? 답답하고 캄캄하십니까? 곧 미칠 것 같은데, 같기만 하십니까? 여기를 클릭 하십시오 월간『현대문학』에서 읽었습니다. 우울의 나날이었던 것은 분명한데 그 우울의 날들이 길어져서 .. 2022. 4. 15.
김언희 「여느 날, 여느 아침을」 여느 날, 여느 아침을 김언희 여느 날 여느 때의 아침을, 죽어서 맞는다는 거, 죽은 여자로서 맞는다는 거, 섹스와 끼니에서 해방된 여자로서, 모욕과 배신에서 해방된 여자로서, 지저분한 농담에서 해방된 여자로서 맞는다는 거, 어처구니없는 삶으로부터도, 어처구니없는 죽음으로부터도 해방된 여자로서 맞는다는 거, 오늘 하루를 살아 넘기지 않아도 된다는 거, 사랑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 사랑하기 위하여 이를 갈아 부치지 않아도 된다는 거, 칼을 삼키듯 말을 삼키지 않아도 된다는 거, 여느 날 여느 때의 아침을, 죽은 여자로서 맞는다는 거, 매 순간 소스라치지 않아도 매 순간 오싹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 칼질된 고깃덩어리처럼 거죽도 뼈마디도 없이 우둘우둘 떨어대지 않아도 된다는 거,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아침을.. 2019. 9. 21.
김언희 「눈먼 개 같은」 눈먼 개 같은 김언희 눈먼 개 같은 생각, 정육점에 풀어놓은 눈먼 개 같은 생각, 어느새 하고 있는 생각, 처음 하는 것도 아닌 생각, 내가 처음인 것도 아닌 생각, 지저분한 안주 같은 생각, 젖꼭지까지 박혀 있는 돼지 껍데기 같은 생각, 하고 싶지 않아도 하고 있는 생각, 하지 않아도 하고 있는 생각, 등 뒤에서 악어처럼 아가리를 쩍 벌린 채 기다리고 있는 생각, 그림자가 천장까지 닿아 있는 생각, 구멍구멍 쥐새끼처럼 들락거리는 생각, 뼈를 갉아대는 생각, 고무장갑을 불면 튀어나오듯 튀어나오는 생각, 출처가 불분명한 생각, 다리를 절고, 혀를 절고, 자지를 절고, 심장을 절룩거리는 생각, 내가 생각하지 않으려 애쓰는 그 어떤 생각보다 더 역겨운 생각, 여분의 입, 여분의 혀, 여분의 생식기를 가진 생각.. 2019. 7. 10.
김언희 「세상의 모든 아침」 여자대학교 교정에 가보셨습니까? 수백 수천 학생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는, 놀라운 모습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나는 그 교정 비탈길에 서서 넋을 잃었습니다. 어느 한 송이를 가리킬 수가 없는 진홍색 세르비아 꽃밭! 그 빛깔에 정신을 잃었습니다. '이걸 어떻게 하나!' '저 도도한 물결!' 그 순간에는 예쁘거나 아름다운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무슨 행사를 했는지 강당을 나온 그 학생들이 흩어져 눈앞에서 다 사라지고 없을 때 비로소 제정신을 차리고 가던 길을 갔습니다. ♣ 가령 어린이들이 살고 있는 초등학교 교정에 가봐도 좋습니다. 그 '수백수천'의 아이들을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게 됩니다. 그건 내가 초등학교 교장을 해봐서 '완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아이들 중의 누구라도 이쪽을 쳐다보게.. 2012. 9.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