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재미로 학교에 가나?
중3쯤으로 보였다. 무거운 가방을 메고 아파트 앞길을 내려오고 있었다. 내려뜨린 머리칼이 얼굴을 다 가리고 있어서 잠깐 섬찟했고, 스쳐 지나갈 때 겨우 그 표정을 일별할 수 있었다. 많이 일그러져 있었다.
순간, 그 소녀에게 까닭 없이 미안한 느낌을 가졌다. 어떤 괴로움 혹은 슬픔이 가녀린 소녀의 가슴을 할퀴고 있을까. 그 소녀와 가까운 사람 중 누군가가 소녀의 잘못을 지적했겠지만, 따지고 보면 계기는 바로 그 누군가의 행위였을 수도 있다. 그러고도 소녀를 나무랐겠지.
학교에 가봤자 상해버린 그 마음을 달래줄 사람이 없다면, 잘못을 저질러 놓은 그 사람 대신 사과해주고 싶었다. 그 마음을 돌려놓을 수 있는 길을 찾아주면 소녀는 편안한 마음, 환한 얼굴로 학교에 가서 친구들과 선생님들을 즐겁게 만날 수 있겠지. 소녀에게 무슨 큰 잘못이 있을 수 있나? 왜 아침부터 그렇게 일그러진 표정으로 학교에 가야 하나?
그런 표정, 그런 가슴으로라도 학교에 가야만 하는 이유가 뭘까? 소녀는 어떤 교육을 받으러 학교에 가야만 할까? 수능시험 치르는 암기력 훈련? 조선 후기 화가 정선의 대표작은 ‘인왕제색도’라는 것? 학교라는 곳 혹은 교과서는 왜 그 놀라운 화가의 다른 그림, 마음의 깊이는 알아보게 하지 않는 걸까? 전공할 학생은 더 알아보라는 것이겠지? 언제 어떻게 더 공부할 수 있을까?
누가 정한 대표작이어서 교과서마다 그 그림만 보여주는 걸까? 그런 공부는 어디에 쓰는 걸까? 마음이 넓어지고 깨끗해지나? 아무리 고달프고 어려워도 삶은 충분한 가치가 있으며 그렇게 하면서 행복을 느끼게 된다는 걸 경험하는 데 필수적이거나 핵심적인가?
학교는 어떤 곳일까?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이념 아래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인격을 도야(陶冶)하고 자주적 생활능력과 민주시민으로서 필요한 자질을 갖추게 함으로써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고 민주국가의 발전과 인류공영(人類共榮)의 이상을 실현하는 데에 이바지하게’(초중등교육법) 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실제적으로는 어떤 공부를 가르쳐준다는 걸까?
거기엔 엄마 아빠와 잘 지내고 친구들이랑 선생님 잘 사귀는 일도 들어 있을까? 세상의 많은 일들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고 협력하는 삶, 가령 고등학교를 거쳐 대학 가고, 직장 찾고, 결혼하고, 살아가는 일, 그 삶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는 기회를 제공해 주는 걸까?… 아니면, 그런 것들은 구체적으로 배우지 않아도 좋은 시시한 것들일까?
전국 초중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온라인 조사 결과, 스마트폰·인터넷 의존 위험 수준인 청소년이 21만 명이 넘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5명 중 한 명이 과의존 위험군이어서 일상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고, 그러한 학생은 중학생의 경우가 가장 많더라고 한다. 어느 신문의 기사 제목은 일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매우 자극적인 것이었다. “아들, 또 스마트폰 보는 거야?”
그렇겠지. 가정에서나 학교에서나 재미가 없다면 그 청소년들이 찾을 것은 호기심과 재미를 느낄 만한 대상이고, 별 어려움 없이 접근할 수 있는 것은 스마트폰·인터넷일 것이다.
그것이 안 된다면 어떻게 하라는 것일까? 책을 봐야 한다? 이제 추리소설이나 만화책은 그만두고, 교과서를 읽고 문제집을 풀고, EBS에서 교과별 강의를 들으면 된다는 얘기겠지.
누구에게 물어봐야 할까? 청소년들이 지금 재미있게 살아가고 있는지 알아보고, 재미있게 살아가는 길을 연구해 본 적이 있는지, 그런 연구가 충분히 이루어지고 있는데 우리 눈에 띄지 않는 건지, 혹 그런 연구는 연구답지 않아서 아예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건 아닌지… 교육학자, 교육행정가들은 지금도 무엇엔가 충분히 골몰하고 있는 건 분명하지만 무엇을 위해 어떤 일을 그처럼 열심히 하고 있을까? 혹 재미없어도 교과서 공부, 수능시험 훈련에 집중하게 하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소녀의 그 아침은 특별한 경우였을까? 중3 또래들에게 물어보았다. 학교가 재미있을 때가 있단다. 요약하면 친구들이나 선생님과 마음껏 웃을 수 있을 때, 함께 얘기하고 놀면서 공감을 느낄 때 재미있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