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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L. 카 《요크셔 시골에서 보낸 한 달》

답설재 2025. 6. 17. 08:16

 

 

 

J. L. 카 《요크셔 시골에서 보낸 한 달》A Month in the Country

이경아 옮김, 뮤진트리 2022

 

 

 

오랜만이야.

몇십 년을 기다려 내게 온 느낌으로 이 소설을 읽었어.

 

파스샹달 전투(1917)의 후유증으로 안면을 실룩거리는, 가난하고 순수한 청년, 런던 출신 톰 버킨이 석회에 파묻힌 시골 마을 교회의 중세 벽화를 복원하는 일을 맡아 그 벽화('최후의 심판')의 아름다움에 몰입하여 지낸 여름 한철의 얘기야.

 

버킨은 그 시골 마을을 사랑했고, 그곳 사람들과 꿈결처럼 따뜻하게 지냈어.

'따뜻한 사람들'의 유일한 예외가 있어. 벽화 복원을 맡긴 목사 키치야. 그는 '신에게 자신을 바친 사실로 동료 시민을 대하는 태도에서 보이는 인간적 결함을 변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유형의 인간이야.

 

버킨은 하필이면 그 목사의 아내 앨리스 키치와 서로 사랑에 빠지는데, 앨리스는 소설 속 아름다운 소녀처럼 등장해.

무덤 발굴 작업을 맡은 찰스 문은 이렇게 표현했어. "옥스갓비 같은 촌구석에 가장 순수하고 고요한 빛으로 만든 보석이 숨겨져 있을 줄 상상이나 했겠어!"

버킨은 이렇게 생각해. '키치 같은 특이한 인간이 어떻게 앨리스 같은 특이한 여성과 맺어져 함께하고 있을까?'

농담 같지만, 세상의 남자들이 보기에 세상의 미인들은 거의 같잖은 남자와 살고 있고, 세상의 여자들이 보기에 세상의 멋진 남자들은 하필이면 희한한 여자와 살고 있는 경우가 흔하다고 하잖아? 문이나 버킨이 이 농담을 들으면 "그럼 목사 부인을 한번 만나보라"고 할 것 같아.

 

 

"당신이 매력적인 것 이상이라고 말할 남자들이 잔뜩 있을걸요. () 그 남자들은 당신이 아름답다고 할 거예요."

"어머나. () 그럼 당신은요?"

"나요! 음, 나는 화가는 아니에요. 하지만 런던예술대학에서는 내게 졸업장을 주면서 내 눈길이 아름다움에 가닿을 때마다 그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감식안을 가졌다고 확실한 보증을 해줬죠. 그래서, 전문가답게 당신에게 말한다면, 맞아요, 당신은 아름다워요, 몹시."(214)

 

 

그 사랑이 있어서 세상이 아름다웠던 것일까?

 

앨리스와 버킨은 지옥에 대해서도 얘기해.

'최후의 심판'의 그 지옥이 아니야. 앨리스는 버킨으로부터 잘못 맺어진 사람과 살아가는 것이 지옥이라는 말을 듣고 싶었던 것 같아.

그렇지만 버킨은 팔다리가 날아다니던 파스샹달의 그 전투가 지옥이었다고 얘기해. 다른 남자들과 몸을 섞고 끝내 집을 나가버린 아내 비니는 또 다른 지옥이었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사연을 꺼내진 않았어. 우리는 실제로 흔히 이렇게 이야기하며 살아가는 것 같아. 정작 하고 싶은, 해야 하는 이야기는 하지 못하고 말지. 앨리스는 현실의 지옥에 대해 물었지만 안타깝게도 버킨은 그녀의 지옥을 얘기해주진 못한 거야.

어디에나 지옥은 있지만, 또 어디에나 사랑은 있다는 얘기일 수도 있을까?

세상은 지옥이기도 하고 천국이기도 하다는 걸까?

파스샹달 전투의 지옥 때문에 지금 이 시골 마을에서 보내는 여름이 천국처럼 느껴진 걸까?

 

버킨과 앨리스는 그 사랑을 붙잡지 못해.

 

 

우리는 함께 들판을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쉽게 몸을 뺄 수 있음에도 그러지 않았다.

그때 나는 팔을 들어 그녀의 어깨를 감싼 후 그녀의 얼굴을 내게 돌리고 입을 맞추었어야 했다. 그런 일이 벌어져야 하는 날이었다. 그녀가 온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랬다면 모든 것이 달라졌으리라. 내 인생도, 그녀의 인생도. 우리는 우리 두 사람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소리 내어 말했어야 했다.(237)

 

 

'요크셔 시골에서 보낸 한 달', 사랑과 행복은 잡지 않으면 지나가고 마는 덧없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 같아.

흔히 그 여름날은 있었지만, 누구에게나 한순간이었을 뿐이지. 그 여름날의 젊음처럼

그리고 우리는 영영 되돌아갈 수는 없어.

 

 

내가 그곳에 그대로 머물렀다면 언제까지나 행복했을까? 아닐 것이다. 아닐 것 같다. 사람들은 떠나고, 늙고, 죽는다. 모퉁이를 돌 때마다 새로운 놀라움이 펼쳐지리라는 긍정적인 믿음은 옅어진다.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만나지 못한다. 우리는 행복이 눈앞을 날아갈 때 얼른 잡아야 한다.(192)

 

 

이야기는 끝났어.

끝났지만, 그 버킨은 어디에서 지금도 살아가고 있을 것 같아. 나처럼… 특별히 이야기할 것 하나도 없는 사람이 되어

그러면 세상에는,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하거나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거나 간에 '여름'을 보낸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고 할 수 있겠지?

그렇지 않아?